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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shed on 2월 19th, 2013 | by 경계를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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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다음 공격상대 ‘이란’은 어떤 나라인가

* 이 글은 제가 인권잡지 월간 <사람>(www.esaram.org) 2006년 6월호에 기고했던 글입니다. 몇달이 지나 올리는 거라 레바논과 팔레스타인 침공 같은 최근 정세는 당연히 빠져있구요, 그게 아니더라도 제가 사람에 기고한 글 중에서 쓰고나서도 가장 아쉬운 글 중 하나인 것 같습니다, 쩝쩝.

미국의 다음 공격상대 ‘이란’은 어떤 나라인가
– 9·11로부터 시작된 전쟁의 연결고리를 끊기 위하여

최재훈 | 경계를 넘어 활동가

지난 4월 18일 미 백악관 기자회견장. 한 기자가 조지 W. 부시 대통령에게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대통령께서는 이란에 대해 얘기할 때, 그리고 이란에 대한 외교적 노력에 관해 언급할 때 모든 선택 가능한 방안(all options)이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건 핵 공격의 가능성까지도 포함하는 겁니까?” 부시 대통령이 대답합니다. “모든 선택 가능한 방안이 테이블 위에 있습니다.”

처음에 이 기사를 읽었을 때는 ‘뭐 이런 썰렁한 대답이 다 있나’하고 헛웃음이 나왔습니다. 홍길동 아버지가 “이제부터 호부호형(呼父呼兄)을 허(許)하노라” 했더니,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데 호부호형을 허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하고는 끝내 집을 나가 버렸다는 ‘홍길동 개그’가 떠오르기까지 하더군요.

그러나 이내 미간이 찌푸려지고 얼굴엔 웃음기가 싹 사라집니다. ‘이 인간들, 또 사고 치겠구나.’ 우스갯소리로 이라크 침공을 규탄하는 피켓의 잉크도 채 마르기 전에, 미국이 이번엔 이란을 상대로 한 군사공격을 정말로 실행에 옮길 수 있겠다는 생각이 팍팍 현실감 있게 와 닿는 순간이었습니다. 핵 공격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 특별히 부정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것도 가능하다는 걸 사실상 시인한 거 아니겠습니까.

이라크전 규탄 피켓 잉크도 마르기 전에 다시 이란을?

요즘 미국 언론들이 쏟아내는 이란 관련 기사들을 보면 이미 이란에 대한 공격은 기정사실화 된 느낌을 받습니다. 다만 언제 어떤 절차를 거쳐, 어디를 어떻게 공격할 지만을 놓고 갖가지 분석과 추측을 해댑니다. 도대체 왜 미국이 이란을 공격해야 하는지, 그럴 권한이 있기나 한 지는 이제 논란거리도 안돼 보입니다. “쟤들이 자기 입으로 우라늄 농축 성공했고, 핵 개발 포기 안 한대잖아”하면 얘기 끝입니다. 대신 4월 9일자 워싱턴 포스트 지는 부시 행정부가 “이란에 대한 군사공격의 두 가지 주요한 가능성을 검토 중”인데, “첫 째는 일단 이란 핵 관련 시설에 대해 신속하고 제한된 공격을 감행한 후 이란이 이라크 등지에서 테러 공격으로 대응하면 다시 폭격을 재개하겠다고 위협하는 방안, 두 번째는 핵 시설 뿐만 아니라 이란 정보국 사령부와 혁명 수비대, 그외 정부 시설에 대해서도 크루즈 미사일을 사용해 폭격을 가하는 방안”이라고 보도했습니다. 덧붙여 “국방성 정책입안자들은… 전술 핵무기 사용을 신중히 검토하고 있다.”고 합니다. 또 4월 17일자 뉴요커(The New Yorker)지의 베테랑 기자 세이무어 허시(Seymour Hersh)는 “가능한 주요 공중 공격이 진지하게 계획되기” 시작했고, “공군 전략가들이 목표 대상의 리스트를 작성하고 있으며 미군 전투부대가 목표 데이터를 수집하기 위해 비밀리에 이란으로 침투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전합니다. 허시는 “국방성은 지하 핵시설에 대해 B61-11같은 벙커버스터 전술핵무기 사용을 이미 지난 겨울에 백악관에 요청”했고, 이에 대해 한 국방성 고문이 “국방성 민간 관료들과 정책 그룹들 내에서 전술 핵무기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나고 있다.”라고 그에게 말했다고도 밝혔습니다.

사태가 점점 심각해지자, 이제 전세계 반전평화운동 단체들도 조금씩 미국의 이란 공격을 막기 위한 목소리를 높이고 행동에 나서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너무 앞서나가는 거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는 희미합니다. 다만 아직 현실적으로 와 닿지 않는다는 사람들도 있고, ‘설마…’하는 사람들도 많은 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미국이 전쟁 계획을 확정짓고 명분 쌓기에 나설 때가 되서야, 각 언론사가 개전 날짜 맞추기 모드에 돌입하고 생중계 준비에 호들갑을 떨 무렵이 돼서야 구체적인 행동에 나서서는 안 될 것입니다. 반전평화운동이 전쟁광들이 전쟁을 일으키고 나서야 비로소 움직이는 ‘종군(從軍)운동’이라는 비판을 받아서는 안 되겠지요.

그래서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이 글을 쓰고 있는 저부터라도 미국의 이란 공격을 반대하는 행동에 나서기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호소하고 설득하려면 뭘 알아야 이야기라도 한 마디 할 텐데, 막상 돌아보니 이란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별로 없었네요. 이번 일이 있기 전에도 비교적 중동국가들 중에서는 우리 입에 자주 오르내리던 나라였는데도 말이죠. 그래서 이번호에서는 이란이라는 나라의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역사에 대해 독자 여러분들과 같이 정리해보는 기회를 갖도록 하겠습니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사이에 있는 ‘아리아인들의 땅’

‘아리아인들의 땅(the Land of Aryans)’이라는 뜻을 가진 이란을 우리는 대개 중동권, 이슬람권, 아랍권 국가로 기억합니다. 그러나 아시아의 서쪽인 중동에 위치하고 있고 국민의 99%가 이슬람(그 중 90%가 시아 무슬림)을 믿고 있는 것은 맞지만, 이란은 아랍 국가는 아닙니다. 아랍 민족이 주를 이루는 그 지역의 다른 국가들과는 달리 이란은 페르시아 민족이 과반수를 넘게 차지하고 있고 공용어도 페르시아 어를 사용하는 나라입니다.

이란은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중앙에 위치하고 있어서 예전부터 지정학적인 중요성이 높이 평가되어온 나라입니다. 북으로는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투르크메니스탄 등 구소련에서 독립한 중앙아시아 국가들과 닿아 있고, 동으로는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서쪽으로는 터키, 이라크와 국경을 접해 있습니다. 이들 나라의 면면만 보더라도 이란이 항상 국제정세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영향을 크게 받을 수밖에 없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당장 9.11 이후 미국이 이른바 ‘테러와의 전쟁’을 벌인 나라들도 이란의 좌우에 위치한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이었으니까요.

이란이 근대 국가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건 1905년 시작된 페르시아 입헌 혁명 때부터입니다. 1908년에는 이란 땅에서 석유가 발견되고, 1921년에는 페르시아 코사크 여단의 장교이던 레자 칸(Reza Khan)이란 사람이 영국의 지원을 등에 업고 카자르 왕조에 대항해 쿠데타를 일으켜 이전의 샤 왕조의 전통을 이어받은 레자 샤 팔레비(Reza Shah Pahlavi) 왕조를 세웁니다. 이후 16년 동안 이란을 통치한 레자 샤는 도로를 깔고 산업 진흥책과 국가교육체계를 수립하는 등의 근대화 정책을 추진한 반면, 정치적으로는 전제정치를 일삼았다고 합니다.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1년 4월에는 이란의 석유 자원과 소련에 군수물자를 공급하기 위한 수송로를 확보하기 위해 연합군 일원이었던 영국군과 소련군이 각각 이란으로 밀고 들어옵니다. 그리고는 서방세계의 뜻을 더욱 더 잘 따랐던 아들 샤 무하마드 레자 팔레비(Shah Mohammad Reza Pahlavi)에게 강제로 권력을 이양하게 하죠. 젊은 팔레비 왕은 처음에는 내정에 일일이 간섭하지도 않았고 의회의 권한도 대폭 인정했다고 하네요. 그러나 당시의 이란 정정(政情)은 47년부터 51년 사이에 여섯 명의 총리가 바뀔 정도로 불안정했습니다. 그러던 1951년, 민족주의자인 모하마드 모사데크(Mohammed Mossadegh)가 총리로 당선되면서 정국은 급변하게 됩니다. 모사데크는 이란의 석유 자원을 외국 자본이 독점하고 있는 데 불만을 품은 국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등에 업고 영국 소유의 석유산업을 국유화하는 조치를 취합니다. 그러자 영국은 경제 봉쇄를 통해 국유화 조치를 해제하려 모사데크 정부를 강하게 압박했지만 모사데크는 오히려 팔레비 국왕을 내쫓고 공화국을 선포하게 됩니다.

CIA 공작과 쿠데타, 그리고 친서방 정책

상황이 여기에까지 이르자 미국과 영국은 도저히 모사데크 정부를 그냥 놔둘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립니다. 다른 수많은 3세계 국가에서 그랬던 것처럼 미국의 CIA는 치밀한 공작을 통해 ‘아작스 작전(Operation Ajax)’이라 명명된 군사 쿠데타를 배후에서 조종합니다. 친왕정파의 탱크 연대가 수도로 밀고 들어와 총리 공관을 에워싸고 폭격을 가하자 모사데크 총리는 별 수 없이 항복을 선언했고 잠시 로마로 피신했던 팔레비 국왕은 돌아왔으며 미국과 영국의 정치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과감한 결단력과 실천력에 흡족해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거의 꺼져가는 듯하던 샤 왕조는 미국과 영국 등의 서방세계 덕택에 다시 부활합니다. 그 다음은 은혜를 갚을 차례였죠. 샤 왕조는 쿠데타 이듬해인 1954년, 미국(40%), 영국(40%), 프랑스(6%), 네덜란드(14%)로 구성된 국제 컨소시엄 회사가 이란 석유시설을 향후 25년 동안 운영하는 데 동의해 줍니다. 이란과 반반씩 이익을 똑같이 나누는 조건으로 말이죠. 그러나 국제 컨소시엄은 석유 생산을 통해 얼마만큼의 수익이 나는지를 이란 정부가 확인할 수 있도록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이사회 내에 이란 정부 측 인사를 임명하는 것도 반대했구요. 그래도 팔레비 왕조는 큰 불만은 없었나 봅니다. 하긴, 하마터면 정처 없이 외국을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될 뻔 했으니 불만이 있어도 내색할 수 있었겠습니까.

어쨌든 1950년대 말과 60년대를 거치면서 이란은 완전히 친서방, 세속화의 길을 걷습니다. 국내 상황도 겉보기에는 그 어느 때보다 안정을 되찾아가는 듯 했습니다. 1961년도부터는 ‘백색혁명(White Revolution)’이라 불리는 일련의 경제, 사회, 행정 개혁에 착수하는 한편, 근대화와 경제성장에도 박차를 가했습니다. 군사적으로도 석유 수출을 통한 막대한 이익금과 서방의 지원을 토대로 대대적인 군비강화를 추진해 1970년대 초반에는 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군사대국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사실 요즘 미국이 시비를 걸고 있는 이란의 핵과 대량살상무기 개발 논란도 70년대 당시에 미국이 지원해줬던 핵과 무기 개발 기술이 다시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다만 그때와 지금의 차이점이라면 당시엔 이란 정부가 미국이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따랐다면,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겠죠.

그러나 팔레비 왕조가 추진한 개혁 프로그램은 국민 전체의 생활수준과 권리를 향상시키지는 못했습니다. 오히려, 개혁의 과실이 소수 기득권층에게만 돌아가고, 절대 다수의 국민들은 빈곤과 차별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또한, 정부의 자유주의 친서방, 세속화 정책은 이슬람 종교운동 세력들과 민족주의, 사회주의 세력들을 철저히 소외시켰습니다. 1960년대 중반부터 ‘무자헤딘-이-칼크(Mujaheddin-e-Khalq)’같은 반체제 운동조직들이 등장하면서 다시 정국은 불안해졌고 팔레비 국왕은 ‘사박(SAVAK)’이라는 정보기관을 창설해 반정부 운동을 힘과 공포로 억누르려는 자충수를 두게 됩니다. 당시 사박이 저지른 체포, 납치, 구금, 고문 등으로 인해 사망한 사람들만 약 1만 5천명에 달하는 등 독재정치가 잔혹성을 더해갈수록 그에 반비례해 민심은 점점 멀어져만 갑니다. 반대로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Ayatollah Ruhollah Khomeini)를 중심으로 한 이슬람주의자들을 따르는 국민들은 점점 더 많아지게 됩니다. 1970년대 후반 무렵에 이르자, 국민들의 반독재, 반왕정, 반서방 요구는 비등점에 이르게 되고, 결국 1979년 1월 16일 팔레비 국왕이 이란을 탈출함으로써 이란은 세계 최초로 이슬람 혁명을 성공한 국가가 되지요.

세계최초의 이슬람 혁명 국가

방금 이슬람 혁명이라고 했지만, 원래 당시의 혁명은 성직자들을 비롯한 이슬람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 자유주의자들의 합작품이었습니다. 즉 혁명세력 내에 반독재, 반외세(반기독교)의 목소리만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여성을 비롯한 국민들의 보편적 기본권 신장과 경제 정의, 정치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들도 분명히 존재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국가 최고 종교 지도자인 호메이니가 최고의 권력을 행사하는 신정체제가 확립되면서 인권과 평등, 개혁의 정신은 슬그머니 사라지고 이란은 세계에서 가장 보수적인 이슬람주의 국가가 됩니다.

1989년 호메이니가 사망한 이후 1990년대부터는 국내적으로 보수파와 개혁파 간의 치열한 투쟁이 불붙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한 때 개혁파 지도자인 무하마드 하타미(Muhammad Khatami)가 대통령에 당선돼 젊은 대학생들과 개혁세력의 기대를 한 몸에 받은 적이 있지만, 끝내 호메이니의 뒤를 이은 최고 종교지도자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의 벽을 넘지는 못했습니다. 작년 6월에 새로이 대통령으로 당선돼 요즘 국제사회의 관심의 초점이 되고 있는 마흐무드 아흐마디네자드(Mahmoud Ahmadinejad) 현 대통령도 이슬람 혁명 직후인 1979년 4월, 미국에 망명 중이던 팔레비 국왕을 재판에 회부하도록 이란으로 송환할 것을 요구하며 테헤란의 미 대사관을 점거해 444일 동안 63명의 인질을 억류했던 이란의 학생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강경 보수파 지도자입니다.

이란의 대외 관계, 특히 미국을 비롯한 서방과의 관계도 국내 정치와 궤를 같이 합니다. 미국에서는 민주당 빌 클린턴 행정부가, 이란에서는 하타미 정권이 집권하고 있을 무렵에 잠시 두 나라 사이의 관계 개선을 위한 대화가 시도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시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상황은 다시 1979년 당시로 돌아가 버린 듯합니다. 아니, 오히려 그때보다 더욱 더 위태로워 보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전술 핵무기 사용을 포함한 미국의 대이란 공격이 점차 수순을 밟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 두서없이 얘기를 펼쳐놓다 보니 어느새 글을 마무리해야 할 때가 됐네요. 저는 외교 분석가도 아니고, 평론가도 아니며, 예언자는 더더욱 아닙니다. 그래서 이란의 핵무기, 대량살상 무기 개발은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야 한다는 미국의 주장과 국제적으로 용인되는 범위 내에서의 평화적 핵 이용의 권리를 활용할 뿐이라는 이란의 주장이 정면으로 맞부딪쳐 (비록 제한적이더라도) 전쟁으로까지 이어질지, 아니면 다행히도 파국을 막을 해결책을 찾을 지는 저로서도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건 2001년 아프가니스탄-2003년 이라크-2006년 이란으로 이어지는 전쟁의 연결고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야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다행히 평화적인 방식으로 문제가 해결돼 제가 양치기 소년이 되더라도 행복할 겁니다. 결국 전쟁으로 가느냐, 평화로 가느냐는 선택은 부시 대통령의 테이블 위에 있는 게 아니라 전쟁을 반대하는 우리들의 테이블 위에 있는 지도 모릅니다.

2006-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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