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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shed on 2월 21st, 2013 | by 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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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줌마] 소수민족 줌마의 이야기_고통에 맞서 변화를 가능케하는 것은 바로 당신의 관심

당해본 사람이 당한 사람의 마음을 더 잘 이해한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다른 나라에 의한, 혹은 국가에 의한 탄압과 억압에 맞서 싸우는 이들이 한국에 오면 한국의 과거를 이야기하며 한국 사람들에게 관심을 호소하곤 한다.

하지만 그 말이 정말 맞는지는 잘 모르겠다. 뭐든지 빠르다는 한국 사람들이라 100년도 안된 과거의 일들을 모두 잊었는지 그들에게 호소하기는 말을 거는 것부터가 만만치 않다. 그럼에도 고향을 떠나 한국까지 오게 된, 자신들의 억울하고 안타까운 사연을 호소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지하철 5호선 송정역에서 버스를 타고 김포 공항을 지나 4-50분 정도 달려 종점에 도착해 슈퍼와 꽃집을 지나면 예전에는 작은 가게로 쓰였을 것 같은 건물에 줌마인 연합 한국지부(Jumma Peoples Network-Korea)의 사무실이 있다.

사무실의 주인인 줌마인 연합 한국지부의 회원들은 방글라데시의 소수민족 줌마 사람들로 모두 16명인데, 이 중 13명이 한국 정부의 난민 지위 인정을 받았고 나머지 3명도 난민 신청을 한 상태이다. 이 들은 낮 동안 공장에서 일을 하는 노동자로서 다른 외국인 노동자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생활을 한다. 하지만 일을 하지 않는 주말에는 사무실에 모여 자신들이 겪었던 고통스러운 경험이 현재에도 진행되고 있는 고향을 이야기 하며 정부와 군대의 탄압을 피해 고향을 떠나온 난민이 된다.

한국 사람들이 거의 알지 못하고, 세상에도 많이 알려지지 않은 줌마족의 고향은 방글라데시 동남쪽에 위치한 치타공의 가파른 산악지대이다. 이 지역에서 오랫동안 살아 왔던 챠크마, 마르마, 트리퓨라, 탄창갸, 미로, 루샤이, 큐미, 챡, 컁, 바움, 팡콰. 링 등 12개 민족을 줌마족, 줌마 사람이라고 부른다.

치타공 산악 지대가 방글라데시의 영토이기 때문에 줌마족도 방글라데시 국민이라 할 수 있지만, 줌마족은 방글라데시의 절대다수를 이루는 벵갈리족과 인종이 다르고 언어와 종교를 비롯한 모든 문화가 다르다. 그럼에도 줌마족이 방글라데시 영토에 속하게 된 것은 국경선 긋기의 정치적 싸움에서 전혀 고려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산악 지대에서도 고래의 싸움이 벌어지면 새우등이 터지는 법이다.

영국이 인도를 지배하던 시절, 인도에 속해있었으나 치타공 지역의 자치권을 인정받았던 줌마족은 인도가 영국에서 독립하고 다시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나뉘면서 파키스탄의 영토에 속하게 되었다. 이 때부터 줌마족의 탄압과 고통의 역사가 시작되는데, 파키스탄 정부는 치타공 산악 지대에 수 백 가구의 이슬람인들을 정착시키면서 줌마 사람들을 내쫒기 시작했다.

그리고 치타공 산악 지대에 수력 발전소를 건설하면서 경작 가능한 땅의 약 40%를 수몰시키고 땅을 잃은 10만 명 가량의 줌마 사람들은 인도로 내쫓겼다. 민족말살정책에 가까운 파키스탄 정부의 행위에 불만을 갖고 있던 줌마인들은 1971년 방글라데시(당시 동파키스탄)의 독립전쟁이 일어나자 벵갈리인들과 함께 전쟁에 참가해 파키스탄에 맞섰다.

줌마족은 새로운 국가가 자신들의 권리를 보장해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방글라데시 정부도 파키스탄과 다르지 않았고 줌마족의 고통은 더해졌다. 방글라데시 정부의 모든 정책은 벵갈리인 중심으로 돌아갔으며 정부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군대를 동원해 줌마의 땅을 강제로 빼앗고 뱅갈리 이주민들의 정착촌을 건설했다. 1억의 방글라데시 인구에 65만의 줌마 인구는 턱 없이 작은 소수였고, 방글라데시 인구의 98%를 구성하는 벵갈리 족과 인종과 문화가 다른 줌마족의 권리 보장은 국가가 보장하는 민주주의 원칙에도 호소할 수 없었다.

줌마인들은 정당 활동과 무장 투쟁으로 방글라데시 정부와 군대의 탄압에 맞섰지만 정부와 군대, 벵갈리 정착민들의 탄압은 더욱 거세졌다. 군대는 무장 투쟁의 범인을 색출한다는 명목 하에 줌마인들의 가정집을 무단 수색하였고, 죄 없는 민간인들을 투옥시키고 고문하였다. 벵갈리 정착민들은 군대의 보호 아래 정착촌을 늘려나갔고 줌마인들을 공격해 방화와 폭행을 일삼으며 줌마족 여성들을 집단 성폭행 하기도 하였다. 계속되는 벵갈리인들의 공격에 20만 명 이상이 고향을 떠나 인도나 다른 지역으로 흩어졌다.

1997년 12월, 25년 이상 이어진 싸움을 끝내고자 줌마의 정당 PCJSS(Par Parbattya Chattagram Janasamhati Samity, ‘치타공 산악 지대 사람들의 연대 연합’이라는 뜻)은 정부와 평화협정을 맺고, PCJSS의 무장 조직인 샨티 하비니는 총을 내려 놓았다. 그러나 방글라데시 정부가 약속한 평화협정의 조항들은 이행되지 않았고, 정부는 줌마에 제한된 지역 자치를 제안하였다.

이에 학생들을 포함한 PCJSS에서 분리된 정당은 UPDF(연합민중민주전선)이라는 새로운 정당을 구성하고 ‘완전자치’를 요구하며 줌마의 싸움을 이어나갔다. 이후 지역위원회를 구성해 정부의 일부가 된 PCJSS와 완전자치를 요구하며 반정부 활동을 벌이는 UPDF의 갈등이 줌마의 새로운 문제가 되었고 정부와 군대의 탄압, 벵가리족의 공격은 멈추지 않았다.

정부와 평화 협정을 맺은 지 9년이 지났지만 줌마인들의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줌마의 상황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고 있다. 지난 4월 초에도 벵갈리 정착민들이 군대의 보호 하에 정착촌을 건설하고 줌마 사람들을 공격해 수십 명이 부상당하고 여성들이 조직적인 집단 강간을 당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줌마 사람들은 이러한 방글라데시 정부의 부당한 탄압을 세상에 알리고 방글라데시 정부에 압력을 가하여 자신들의 고통이 끝나기를 바라고 있다.

물론 줌마가 세상의 관심을 받는 것은 이들의 간절함에 비해 힘든 일인지도 모른다. 집을 빼앗기고 죄 없이 잡혀가고 생명에 위협을 받는 사람들의 사연이 우리가 다 알 수 없을 만큼 너무 많고, 또 세상 사람들의 관심은 그리 관대하지 못하다. 명백하게 거짓으로 꾸며댄 전쟁에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이라크에 대해서도 사람들의 관심은 차갑게 식어가고 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줌마 사람들이 희망을 놓을 수 없는 이유는 고통을 주는 이도 사람이고 고통에 맞서 변화를 가능케 하는 것도 사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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