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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shed on 2월 22nd, 2013 | by 경계를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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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 이것이 너희들이 말하는 해방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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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3 – 모하메드 다우드(Mohammed Daud)가 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공화국 선포
  • 1978 – 다우드가 살해되고 인민민주당이 정권을 잡음. 사회개혁에 반대하는 보수적인 이슬람주의 조직과 민족 지도자들이 무력 저항을 벌임
  • 1979 – 소련이 아프간 침공
  • 1980 – 소련이 지원하는 인민민주당과 미국, 파키스탄, 중국, 이란, 사우디 아라비아의 지원을 받은 무자히딘 조직이 전쟁을 계속 함
  • 1985 – 계속되는 전쟁으로 아프가니스탄 인구의 1/2이 이란과 파키스탄 등 주변 국가로 피난을 떠났음
  • 1988 – 아프가니스탄과 소련, 미국, 파키스탄이 협정 체결. 소련군 철수 시작.
  • 1991 – 미국과 소련이 양측에 군사 지원을 중단하기로 결정
  • 1996 – 여러 조직들 사이의 전쟁이 있은 후 탈레반이 카불을 점령하고 강력한 사회억압 정책을 실시
  • 1997 – 탈리반이 아프가니스탄의 2/3을 통제
  • 1998 – 미국이 아프리카의 미 대사관 폭파 혐의로 오사마 빈 라덴을 지목하고, 아프가니스탄에 보복 공습.
  • 1999 – 오사마 빈 라덴을 양도받기 위한 압력으로 아프가니스탄에 금융제재 시작
  • 2001 – 9.11 발생. 10월, 오사마 빈 라덴을 넘겨주지 않자 미국과 영국이 아프가니스탄에 공습 시작
  • 2001년 12월 – 탈리반이 마지막으로 통제하던 칸다하르를 포기
  • 2002년 12월 –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투르크메니슽안이 아프가니스탄을 지나는 가스 수송관 건설 계획에 합의
  • 2004년 11월 – 과도정부 수반이었던 하미드 카르자이(Hamid Karzai)가 대통령으로 당선
  • 2005년 9월 – 30여년 만에 첫 의회와 지방 선거 실시
  • 2006년 5월 – 카불에서 점령에 저항하는 무력 시위가 일어나 사망자가 발생하고 미군 차량이 파괴됨. 2001년 탈리반이 무너진 후 최악의 사건으로 기록.
  • 2006년 5월~ 6월 – 아프가니스탄 남부에서 벌어진 저항군과 아프간군, 연합군의 전투에서 많은 수의 사망자가 발생
  • 2006년 10월 – 나토가 아프가니스탄 전 지역에 대한 작전권을 이양 받음.
  • 2007년 5월 – 탈레반의 최고 군 지도자인 물라 다둘라(Mullah Dadullah)가 미군과 아프간군과의 전투 중 사망
  • 2007년 11월 – 북쪽 바그람 지역에서 의회의원들을 겨냥한 폭탄 공격으로 41명이 사망

2001년 10월, 미국은 911 테러의 용의자로 오사마 빈 라덴을 지목하고 영국과 함께 그의 무장조직인 알카이다, 그리고 그들을 지원하는 탈레반을 축출하겠다는 이유로 아프가니스탄에 폭격을 시작했다.

그리고 미국은 얼마 후 말을 바꾸어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아프가니스탄 국가 재건과 여성인권을 위해 계속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 후 나토까지 가세한 아프가니스탄 침공과 점령은 올해로 8년째 계속되고 있다.

과연 그들은 목적대로 무장조직을 소탕하고 국가 재건과 여성인권 신장을 이루었을까? 답은 ‘전혀 그렇지 않다’이다.

전쟁 시작 한 달 만에 ‘소탕’되었다던 아프가니스탄의 저항세력은 어느새 세력을 확장하여 카불과 그 주변을 제외한 아프가니스탄 영토의 75%를 통제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 어린이 4명 당 한 명이 5살을 넘기지 못하고 사망하며, 인구의 평균 기대 수명은 42살로 침공 이전 보다 하락했다.

그리고 여성들의 분신 자살률은 침공 전보다 무려 3배나 증가했다. 미국이 내밀었던 전쟁의 명분은 모두 실패한 것이다. 그럼에도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서 발을 떼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것은 911 테러가 있지 않았더라도,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이 억압을 받지 않았어도 이 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던 것이기 때문이다.

침공과 점령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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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은 이라크처럼 자원이 풍부하지 않지만 미국이 탐낼 만한 지정학적인 조건을 갖추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은 수세기에 걸쳐 중앙아시아와 서남아시아를 잇는 대륙의 교차로 역할을 해왔다. 때문에 수 세기에 걸쳐 웬만한 정복자들은 모두 아프가니스탄을 거쳐 갔다.

현재에도 아프가니스탄은 미국이 중국과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또한 주변국에서 생산되는 석유와 천연가스의 수송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노른자 땅이다.

미국이 본격적으로 아프가니스탄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에 소련과 서로 자신에게 유리한 정권을 세우기 위해 경쟁을 하면서이다. 1978년에 소련이 지원하는 인민민주당 정권이 등장하자 미국은 파키스탄을 통해 아프가니스탄에 있는 반정부 세력을 지원하여 인민민주당 정권과의 싸움을 부추겼다.

당시 아프가니스탄에서는 토지개혁과 여성평등 등의 인민민주당의 개혁적인 사회 정책에 반대하는 여론이 증가하고 있었다. 무슬림인 대중이 그들의 개혁을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1979년부터 ‘무자히딘(이슬람전사)’라고 부르는 게릴라 반군이 미국의 지원을 받아 소련과 인민민주당 정부에 대항하여 전쟁을 벌였다. 결국 1989년, 10년 동안 이어진 전쟁 끝에 소련이 패하고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하였다. 그리고 소련이 무너진 후 아프가니스탄은 자연스럽게 미국의 영향권 안에 들어오게 되었다.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으로

1998년 케냐와 탄자니아에서 미국 대사관을 향한 폭탄 공격이 있기 전까지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정권을 잡은 탈리반이 아프가니스탄 사회와 여성에 어떤 억압을 벌이든 말든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저 탈리반이 미국에 대들지만 않으면 무슨 짓을 하더라도 상관이 없었다.

미국은 대사관 공격이 일어난 후, 사건의 배후에 오사마 빈 라덴과 알카이다가 있으며 탈리반 정권이 오사마 빈 라덴을 지원하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그리고 미국 정부는 아프가니스탄에 미사일 공격을 가했다.

당시 섹스 스캔들로 정치적 위기에 몰려있던 클린턴 행정부에게는 세상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릴 절호의 찬스였다. 이로써 어제까지 미국의 동지였던 탈리반과 오사마 빈 라덴은 소련 없는 시대의 새로운 적으로 화려하게 주목을 받게 된 것이다.

석유를 위한 준비된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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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1997년에 미국 의회는 카스피해 연안과 코카서스 지역을 미국의 이해에 아주 중요한 지역이라고 선언했다.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아제르바이잔 등 중앙아시아와 카스피해 지역에 석유와 천연가스가 매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석유와 천연가스는 특성상 비행기로 나르지 못하고 육지에 수송관을 설치하거나 바다까지 수송하여 배로 옮겨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 아프가니스탄이 있다. 수송관을 설치하려면 설치될 지역의 정부와 계약을 맺어야 하는 것뿐만 아니라 수송관의 관리를 위해서 수송관이 지나는 지역의 안전 상태와 토지사용의 문제도 확보되어야 한다.

아프가니스탄이 안정적으로 미국의 손에 들어와야 미국이 중앙아시아와 카스피해 지역의 석유도 손에 넣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같은 해에 미국의 석유기업 유노칼의 주도 하에 사우디아라비아의 델타오일와 투르크메니스탄 정부, 일본의 이토추가, 그리고 한국의 현대건설이 ‘중앙아시아 가스 파이프라인’이라는 기업을 설립하였다. 다음 해인 1998년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폭격으로 계획이 중단되지만 투르크메니스탄과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정부는 수송관 건설 사업을 계속하기로 합의하였다.

미국 정부는 9.11 사건이 있기 얼마 전인 2001년 8월까지도 탈리반 정권과 수송관 건설에 관한 협상을 진행 중이었다. 그리고 9.11 테러 사건이 일어나자 미국과 영국은 10월에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였고, 나토연합군도 아프가니스탄 침략에 가세하였다.

미국은 아프가니스탄 침공의 명분으로 테러 공격에 대한 응징이라고 공세를 폈지만, 실제로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미국의 침공의지는 9.11 사건이 일어나기 이 전에 이미 드러나고 있었다. 영국 언론 BBC의 보도에 따르면 전파키스탄 외무장관이었던 니아즈 나이크(Niaz Naik)는 2001년 7월 중순에 미국 정부의 고위 관리로부터 10월쯤에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할 것이라는 내용을 들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기막히게 맞아 떨어지는 사건들의 순서를 뒤로하고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을 점령하였고, 아프가니스탄 정부에 친석유기업 인물들을 주요 자리에 앉혔다. 아프가니스탄의 대통령 하미드 카르자이는 CIA의 다정한 친구였으며 석유기업 유노칼에서 근무했었고, 부시가 아프가니스탄 특사로 임명한 잘메이 칼릴자드(Zalmay Khalilzad)는 유노칼에서 근무하면서 탈리반 정부의 수송관 협상에 참여했었다.

이는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점령이 얼마나 석유자원확보와 연관이 있는가를 분명히 보여준다. 아프가니스탄의 새 정부가 구성되자마자 2002년에 아프가니스탄 정부는 투르크메니스탄과 파키스탄 정부와 아프가니스탄 횡단 수송관(Trans-Afghanistan Pipeline) 건설을 합의하였다.

저항에 부딪힌 점령군

하지만 점령 후, 모든 것이 미국의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전쟁 초기에 모두 도망가고 적은 수만이 산 속에 숨어있다던 탈리반은 아프가니스탄 남부 지역을 중심으로 세력을 키워왔고, 아프가니스탄의 많은 지역이 탈리반 시절에 권력을 갖고 있던 지역 군벌들의 통치 하에 들어갔다.

2006년 5월에 미국과 나토 연합군은 아프가니스탄 남부에서 침공 이후 가장 큰 규모의 탈레반 소탕 작전을 수행하였는데, 이것은 탈레반 세력이 얼마나 확대되었으며 이에 미국과 나토군이 얼마나 위기감을 느꼈는가의 증거이다.

2006년 6월 한 달 동안만 무려 340회의 공중 폭격이 나토군에 의해 진행되었다. 미군과 나토군은 작년 말에 지원 병력을 늘려달라고 요청하기도 하였다. 2007년 초에 3개 지방의 20개 지역을 통제하던 저항세력은 2007년 말에 도시 지역을 제외하고 아프가니스탄 영토의 75%를 통제하게 되었다.

이렇듯 아프가니스탄에서 저항세력의 규모와 영향력이 확대되고 있는 것은 점령에 대한 민중의 분노를 보여주는 증거이다. 미국과 주류 언론은 아프가니스탄의 저항세력을 모두 ‘탈리반’이라고 칭하지만 사실 아프가니스탄 내에는 탈리반 뿐 아니라 여러 종류의 저항 조직들이 활동하고 있다.

실제 탈리반도 점령 전의 탈리반과는 조직 구성이 다르고 세력이 확대되었다. 저항조직에 가담하여 활동하는 많은 사람들은 미군과 나토 연합군의 폭격으로 가족과 마을 사람들이 죽어가는 상황을 가만히 보고 있지 못한 이들이다.

지난 7년 동안의 전쟁으로 사망한 아프가니스탄 민간인의 수는 수만 명으로 추정할 뿐 누구도 정확한 집계를 내놓지 못하고 있다. 휴먼라이츠 와치는 2006년 한 해 동안 점령군의 공격으로 약 4,400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다고 발표하였다.

유엔은 2007년 1월 1일부터 8월 1일까지 약 1천명이 사망했다고 보고했다. 오늘도 점령군은 아프가니스탄의 한 마을에 통째로 폭탄을 퍼붓지만, 그 후 마을이 어찌되었는지는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점령이 지속될수록 아프가니스탄 민중에게 남는 것은 국가 재건도, 여성 인권도 아닌 죽음과 타다 남은폭탄 조각뿐이다.

점령을 끝내기 위한 저항만이 아프가니스탄이 꿈꾸는 유일한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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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으로 고친 날 : 2008년 1월22일
- 만든 곳 : 경계를넘어(www.ifis.or.kr), 사회진보연대(www.pssp.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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