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를 넘는 뉴스 haitianprotest_un_copy1

Published on 3월 15th, 2013 | by 재훈

0

[칼럼] 평화유지군이라는 환상을 버려라

현재 살고 있는 집에 일부러 인터넷을 깔지 않은 까닭에 어제서야 뒤늦게 한국군의 레바논 평화유지군 파병 동의안이 지난 12월 5일 국회 법안심사 소위원회에 회부됐다는 소식을 접했다. 파병을 위해서는 아직 거쳐야할 절차들이 남아있긴 하지만 이미 미국에 파병을 정식 통보까지 했다니 정부는 사실상 파병 결심을 굳힌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한 한국 내의 여론은 한마디로 말하면 ‘별로 관심없음’ 인 것 같다. 정치권에서의 논의도 거의 찾아볼 수 없고, 언론에서도 비중있게 다루지 않는 걸로 봐서는 말이다. 물론 몇몇 반전평화운동 단체들이 국회 앞에서의 일인 시위와 성명서 등을 통해 파병 반대의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작지만 대단히 의미있는 행동이라 생각한다. 멀리서나마 격려와 지지의 박수를, 아스따 씨엠쁘레 라 빅또리아(승리의 그날까지!).

그러나, 동시에 아쉬운 점은 일반 국민들은 말할 것도 없고 진보운동 내에서조차도 레바논 파병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이 높지 않다는 것이다. 몇 해 전, 파병반대를 외치며 거리와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던 사람들조차 말이다. 과연 그 이유는 무엇일까? 거기엔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겠지만, 이 글에서 내가 지적하고 싶은 점은 혹시나 ‘유엔 평화유지군’이라는 그럴싸한 단어에 대해 우리 자신도 모르게 현혹되어 있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즉, 유엔의 동의도 구하지 않은 채 감행된 미국 주도의 이라크 침공에의 동참은 결사반대지만, 유엔 내에서의 논의와 합의를 거친 평화유지군은 분쟁과 인도주의적 위기를 중단시키기 위한 공정한 감시자로서 필요한 것 아니냐는 생각, 그래서 이라크 파병과 레바논 파병은 본질적으로 성격이 다른 것이라는 ‘오해’가 존재할 지도 모른다는 염려 말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평화유지군 파병에 대해 반대한다. 그것은 제대로 된 국민여론 수렴과 동의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추진되는 파병 과정 때문이기도 하고, 파병의 근거가 된 유엔 안보리 결의안 1701호가 이스라엘과 미국의 요구가 일방적으로 반영된 편파적이라는 결의안이라는 점 때문이기도 하다. 동시에 나는 군대에 의한 유엔의 평화유지라는 허구, 그리고 평화유지군이 불편부당한 감시자가 될 수 있다는 환상에 우리를 포함한 전 세계가 더 이상 속아 넘어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에 더더욱 평화유지군 파병에 반대한다.

가만히 한번 되짚어보자. 지금까지 유엔과 나토 같은 국제기구의 평화유지군 파병 역사에 서 그 대상 국가의 선정에서부터 결의안 작성과 통과 과정, 그리고 군대의 활동과 역할이 과연 객관적인 감시자와 갈등의 조정자 역할에 제대로 충실한 적이 있었는가? 오히려 미국, 영국, 프랑스 같은 제국주의 국가들의 이해와 영향력을 보호하고 그들의 요구를 관철시키는 도구로 전락하지 않았는가?

이렇게 주장하는 근거는 사례 몇 가지만 들어보아도 충분히 찾을 수 있다.

먼저, 1999년 이른바 세르비아 극우민병대로부터 코소보 주민들을 보호한다는 명분하에 나토 ‘평화유지군’이 코소보에 파병되었다. 그러나, 정작 심각한 수준의 대규모 학살은 평화유지군 파병 전이 아니라 파병 이후에 본격화되었으며, 만약 미국과 나토가 세르비아 공습과 평화유지군의 ‘침공’이 아닌 외교적인 해결방법을 선택했더라면 대규모 잔혹 보복참극은 피할 수 있었을 거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그나마, 같은 해 9월의 유엔 평화유지군의 동티모르 파병은 친인도네시아 민병대에 의한 학살을 중단시키는데 기여하기는 했다. 그러나, 그 뒤 당시 파병을 주도했던 오스트레일리아는 그 덕분에 동티모르의 정치에 대한 막강한 영향력과 천연자원 확보라는 선물 보따리를 듬뿍 챙겼고, ‘감히’ 오스트레일리아를 견제하려 들었던 알카티리 총리는 결국 자리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평화유지군이 결국은 강대국의 이권확보를 위한 도구로 왜곡된 대표적인 사례인 것이다.

카리브해의 빈국 아이티의 사례는 또 어떤가.

2004년, 국민들에 의해 합법적으로 선출됐던 아이티의 좌파 성향의 대통령 장 베르뜨랑 아리스티드가 무장반군의 쿠데타에 의해 쫓겨났다. 당시 반군들이 미국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었는데, 아리스티드가 쫓겨난 이후 유엔은 미국과 프랑스, 캐나다가 주축이 된 평화유지군을 파병해 사실상 쿠데타 정권을 노골적으로 인정, 지지하였고, 그 평화유지군은 지금도 치안유지 지원이란 명목 하에 반대파와 주민들에 대해 무자비한 만행을 일삼는 과거의 반군들을 훈련시키는 일을 하고 있다.

말이 나온 김에 한 가지 사례만 더 들어보자.

유엔 안보리는 올 해 8월 31일, 정부군의 지원을 받은 잔자위드 민병대에 의한 잔혹한 인종청소가 자행되고 있는 수단에 약 1만 7천 명 규모의 평화유지군을 파병한다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물론, 다르푸르 사태의 심각성과 지금도 살해와 굶주림, 전염병의 위협 속에 위태로운 나날들을 보내고 있는 약 250만 명의 난민들이 처한 곤경을 국제사회가 결코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데는 반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여기에도 역시나 심각한 의문이 뒤따른다. 다르푸르 사태가 시작된 시점은 거의 4년 전인 2003년 2월이었다. 그렇다면, 그동안 최소 30만명이라는 엄청난 인명이 비명 한번 제대로 질러보지 못하고 죽어갈 때까지 침묵하고 있던 유엔이, 아니 더 정확히는 미국과 영국이 왜 지금 와서야 평화유지군 파병에 눈에 불을 켜고 나설까? 다르푸르에 매장된 석유와 천연자원이 탐나서, 그리고 아프리카에서 중국의 영향력 확대를 어떻게든 견제해야겠는데 이라크처럼 그냥 치고들어갈 수는 없고 가장 보기좋은 모양새가 평화유지군을 통한 ‘인도주의적 개입’이기 때문이 아닌가? 그래 좋다. 백번 양보해서 순수하게 인도주의적인 목적이라고 치자. 그렇다면, 지난 4년간 3백 5십만 명이 살해된 콩고 민주공화국은, 최악의 가뭄으로 1백 4십만 명이 아사 직전에 처한 소말리아에 대해서는 왜 그 인도주의가 작동하지 않는가?

바로 이와 같은 이유로, 나는 객관적인 감시자이자 분쟁의 해결사로서의 유엔 평화유지군의 역할을 믿지 않는다. 아니, 부정한다. 그래서 한국군의 레바논 평화유지군 파병에도 반대한다. 혹시 현실적인 한계는 인정하더라도 유엔 평화유지군이 나름대로 긍정적이고 필요한 측면이 있지 않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거기에 대해서는 과거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반아파르트헤이트 운동을 이끌었던 한 운동가가 밴쿠버의 젊은 활동가들에게 한 짧은 대답으로 내 대답을 대신하고자 한다. “하지만, 살인자를 막겠다고 살인자들을 보낼 수는 없잖은가?”

2006년 12월 12일 재훈

Tags:


About the Author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다음의 HTML 태그와 속성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a href="" title=""> <abbr title=""> <acronym title=""> <b> <blockquote cite=""> <cite> <code> <del datetime=""> <em> <i> <q cite=""> <strike> <strong>

Back to Top ↑
  • stopADEX 2013 스케치 영상

  • 경계를넘어 메일링리스트


    경계를넘어의 소식을 이메일로 받아보세요!

  • 경계를넘어 on Fli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