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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shed on 3월 28th, 2013 | by 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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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싸움을 하지 않더라도 죽음과 맞닥뜨려야 하는 상황

정치적 살해, 총선 시기 증가 우려

1~2월에 걸쳐 약 한 달 정도 필리핀에서 머무르는 동안, 필리핀 국내 여론의 초점은 온통 5월 총선으로 모아지고 있었다. 특히 2004년 아로요 대통령의 부정선거 조작이 사실로 드러나면서, 이번 선거 역시 또 다른 부정 사태 발발에 대한 우려감은 점점 증폭되고 있었다. 또한 국내 정치적 살해를 비롯한 갖가지 폭력행위들이 뚜렷이 증가되는 모습들이 가세되어, 전사회적으로는 짙은 암운이 깊게 드리운 선거형국이었다.

필리핀의 진보진영은 정당명부제의 도입이후 의석확보에 주력하면서 여러 이름의 정당들을 연이어 창당해 왔다. 그리고 최근 이 정당들에서는 총선 후보자들을 추천하는 당대회를 성대히 개최했다. 바얀무나(BAYANMUNA), 아낙빠위스(ANAKPAWIS), 가브리엘라(GABRIELA) 등의 진보정당들은 지난 선거에서 국회의원을 배출한 가운데, 정치적 입지를 점점 굳혀 옴으로써 이번 선거에서도 진취적인 결과를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군부와 아로요 정권의 정치적 탄압과 폭력이 극심할 것으로 예상되고, 이미 정치 지도자와 활동가들이 목숨을 잃은 비극까지 벌어졌었기에, 각 진보정당들의 당대회는 예상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 단호한 의지와 환호가 뒤섞인 중층적인 분위기 속에서 치러졌다.

특히 최대 3명까지만 가능한 정당명부제의 후보자를 선출하는 자리에서 만약의 경우를 위해 10명 가까이 때로는 그 이상으로 후보자를 선출하는 모습은 매우 인상적이라 할 만하다. 이는 필리핀의 정치적 살해 심각성의 수위가 어느 정도로까지 높아졌는지를 단적으로 드러내준다.

필리핀 군부의 책임이 드러난 정치적 살해

그럼 오늘날 필리핀 사회 내에서의 정치적 살해 혹은 비사법적 살해 실태는 얼마나 심각할까? 아로요 정권 취임 이후 이러한 종류의 살인으로 인한 사망자 수는 2001년 101명, 2005년 189명, 2006년 209명으로 급격히 증가해 왔으며, 실종자 수는 2001년 7명에서 2005년 56명, 2006년 93명으로 기록되었다. 그리고 2007년 현재까지 총 살해된 희생자 수는 883명으로, 평균 일주일에 3명꼴의 통계치를 보이며, 86년 군사독재정권이었던 마르코스가 물러난 이후, 최악의 정권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얼마 전, 정부산하의 진상조사위원회인 멜로위원회에서 출간한 보고서는 정부 편향적이라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벌어진 죽음이 필리핀 정부군과 연관이 있음을 부분적으로 지적한 바 있다. 가장 최근에는 유엔 특별 조사관으로 파견된 필립 알스톤( Philip Alston) 씨가 10일간 여러 지역들을 돌며 피해자들이나 유가족들과의 면담을 진행했는데, 21일 기자회견을 통해서 지금까지 발생한 활동가들과 언론인들 위주의 비사법적 살해가 필리핀 군인들과 경찰들에 의해 저질러졌다는, 설득력 있는 근거들이 존재한다고 밝혔다. 현재 필리핀군측은 이러한 결과들은 사실무근이라고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이 날 기자회견에서 민다나오 지역의 원주민들의 피해상황을 조사했던 다른 한명의 유엔 조사관 로돌포 슈타벤하겐(Rodolfo Stavenhagen) 씨는 현재 벌어지는 정치적 살해 또는 비사법적 살해가 매우 심각함에도 불구하고 아로요 정권은 이를 적극적으로 해결하려는 의지를 보이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국내 복잡한 정치 갈등과 무력분쟁 상황을 충분히 감안해서 나온 유엔의 지적이 이 정도라면, 종래 정치적 살인 배후에서 사실상 아로요 정권이 얼마나 막강한 개입을 해 왔는지를 충분히 유추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정치적 살해는 아로요 정권 군사화 정책의 결과

그동안 아로요 대통령은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한 방편으로 필리핀 군사화에 매달려 왔다. 대표적으로 ‘오플란 반따이 라야’(Oplan bantay laya), 즉 자유수호작전이라는 국가안보체제 수립을 들 수 있다. 이는 필시 필리핀 군부의 힘을 비대하게 만들었고, 피플파워(민중혁명)를 바탕으로 성장해 온 필리핀 민주주의를 빠르게 잠식했다.

아로요 정권의 군사정책은 크게 두 가지 성격으로 분석해 볼 수 있는데, 하나는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직접적 전쟁 수행이다. 그녀는 ‘발리까딴(Balikatan)’ 이라고 불리는 미군과의 합동 군사작전을 광범위하게 전개하도록 허용했고, 동시에 남부 민다나오를 중심으로 실제 군사공격을 감행해 왔다. 아로요 대통령은 민다나오에서 이슬람 분리주의를 주장하는 모로민족해방전선(MNLF), 모로이슬람해방전선(MILF) 세력들과 맺은 평화협정을 이행하기 보다는 테러리스트로 분류된 아부사야프그룹(ASG) 혹은 무장 공산주의자들을 색출한다는 미묘한 논리를 내세워 무고한 무슬림들을 대량 희생자로 만들었다.

또 다른 하나는 배후에서의 비사법적 살해와 체포, 법제 시스템 강화를 통해서 일으키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간접적 전쟁 수행이다. 예를 들면 아로요 대통령은 2006년 2월 피플파워 20주년 기념일 즈음, 점점 고조되는 위기의식을 이기지 못해 포고령 1017호를 내려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그 때 그녀는 좌파지도자들과 저널리스트, 학생 등 10여명을 국가전복을 시도했다는 혐의로 체포하기도 했다. 체포된 사람들 중 한 명인 아낙빠위스의 크리스핀 벨트란 하원의원은 건강악화로 병원으로 옮겨진 채, 아직까지도 감금상태에 처해 있다. 반면 이러한 행위들은 크리스핀 벨트란을 아로요 대통령의 피해자이자 불의에 맞서는 정치인이라는 상징적 존재로 만들기도 했다.

결국 아로요 정권의 이와 같은 무력적 통치 방식은 대량 인권침해를 유발하면서 필리핀 사회를 날이 갈수록 불안정하게 만들고 있다. 가장 최근에는 국회에서의 반테러법 제정이 큰 논란이 되고 있다. 이 법이 효력을 발휘하게 될 때에는 현재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국가 폭력, 정치적 탄압과 인권 침해 등이 심각해질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크다.

싸움을 하지 않더라도 죽음과 맞닥뜨려야 하는 상황…

매년 1월 22일 대통령궁이 위치한 멘디올라 거리에서는, 1987년 아키노 정권 시절 이곳에서 시위 도중 총에 맞아 죽은 13명 농민의 넋을 기리는 행진이 벌어진다. 올해에도 변함없이 마닐라 각지에서는 물론이고 타 지역에서까지 많은 활동가들이 몰려와 행진을 했다. 그들은 멘디올라 학살의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동시에, 현재 벌어지는 정치적 살해를 강력히 규탄하고자 했다. 물론 집회 참가자들 대개가 피해자들에 속한 처지였다.

내가 만난 사람들 중에는 온 몸에 난 총상의 흔적을 보이며 겨우 목숨을 건졌다는 이도 있었고, 가족이나 친척 중에 이미 사망자가 존재하는 유가족들도 많았다. 그리고 중견의 활동가들 대부분이 정치적 살해 위협으로 인해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며 전전긍긍하고 있는 상태였다. 이들이 당하는 정신적 물리적 고통이 얼마나 클지는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유가족과 잠재적 피해자들은 대부분이 국내 난민으로 전락하는 또 다른 심각한 사회문제를 야기하고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 날 마닐라뿐만이 아니라 필리핀 남부 민다나오 지역에서도 멘디올라 학살 추모 집회가 열렸는데, 바로 그 자리에서 한 활동가가 총격을 받는 일이 벌어졌다고 한다. 그는 인근 사무실로 급히 피신해서 살아남을 수 있었으나 여전히 도주상태에 있었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젊은 인권활동가에게 나는 작금의 상황이 두렵지 않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수시로 벌어지는 참극 앞에서 그들의 심정이 어떤지 알고 싶었던 것이다. 그의 대답은 이러했다.

“싸움을 하지 않더라도 지금의 상황은 우리를 충분히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즉 싸움을 그만둔다고 해서 안전해지거나 행복해지지는 않는다는 것이지요. 현재로서는 싸움을 지속하든 하지 않든지 간에 죽음과 맞닥뜨려야 하는 상황입니다.”

2007년 2월 26일 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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