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를 넘는 뉴스 somal

Published on 4월 1st, 2013 | by 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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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말리아] 소말리아: 뉴스에서 보도하지 않는 이야기

소말리아의 민중은 에티오피아의 공격으로 수도 모가디슈가 파괴되면서 또 다른 고통을 겪고 있다. 에티오피아 군은 에티오피아 군부대 한 곳에 대한 공격과 도심 도로에 에티오피아 군의 잘린 사체가 널려져 있던 것에 대한 보복으로 11월 9일에 모가디슈 바카라 시장에 폭격을 가했고, 이 폭격으로 8명의 민간인이 사망하였다. 다음 날 많은 소말리아 인이 사망한 채 발견되었고 전 날 밤 에티오피아 군인의 공격을 받은 것으로 보였다.

이슬람법정연대 측과 정부군과 정부의 에디오피아 동맹군 사이의 싸움이 벌어진 이틀 동안 50명에 가까운 수의 민간인이 사망했고 100여명이 부상을 당했다. 휴먼 라이츠 워치가 발간한 보고서는 유혈사태의 책임이 에디오피아 군대와 ‘반군’ 양측 모두에 있다고 질책하였다. 보고서는 이 감시기구의 아프리카 국장 피터 타키람부데의 말을 인용하여 ‘국제사회는 이러한 공격을 비난해야 하며 상대 군인의 신체를 절단하고 포로를 처형하는 등 인권법을 어긴 행동에 대해 전투원들이 책임을 져야 한다’고 서술하였다.

물론, 누구도 현실적으로 국제사회가 소말리아의 상황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을 것이다. 국제사회의 여러 구성원들은 이미 지난 16년 간의 소말리아 내전에서 오랫동안 자주와 단결을 이루기 위해 싸워온 국가를 조각 내는 가장 파괴적인 역할을 해왔다.

지금까지 소말리아의 전쟁을 오랫동안 계속 된 군벌과 반군 사이의 갈등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불공평한 일이다. 소말리아의 역사는 식민주의적인 탐욕과 근거 없는 외세의 간섭으로 끊임없이 훼손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러한 역사에 따라 소말리아에서는 ‘아프리카의 뿔’이라 불리는 소말리아의 지정학적 중요성에 눈이 먼 국가들의 이익에 붙어 따라다니는 다양한 임시 정부와 무장 단체, 브로커들이 생겨났다.

식민 권력들은 ‘아프리카를 서로 빼앗으려고 다투는’ 시발점이 된 베를린 회담 이후 소말리아가 전략적 요충지로서 중요함을 인식하였다. 소말리아는 19세기 말에 영국과 프랑스, 이태리가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영국령 소말리아와 이태리령 소말리아로 나뉘게 되었다. 영국과 이태리는 영역을 확장하려 노력했고 정복을 위한 전쟁에 소말리아 인들을 참전하게 하였다.

세계2차 대전은 자포자기하는 마음으로 또는 강제로 끌려가서, 전쟁 후의 독립 약속을 믿고 서로 싸우는 유럽 국가들의 편에 서서 전쟁에 참여했던 소말리아 민중에 커다란 상처를 남겼다. 소말리아는 유엔의 명령으로 1949년에 이태리의 보호령 하에 놓여있다가 1960년대 후반이 되어서야 독립을 달성했다. 하지만 식민국들은 소말리아에 대한 관심을 완전히 끊지 않았고 냉전은 소말리아에 미국과 소련, 쿠바 등등 새로운 선수들을 들여왔다.

식민유산의 잔재 중 하나는 대영제국이 에티오피아 정부에 넘긴 소말리아의 오가든 지역이다. 오가든 지역은 에티오피아와 소말리아 사이에 있던 1964년과 1977년 두 번의 큰 전쟁의 무대가 되었다. 많은 소말리아 인들은 여전히 에티오피아를 점령자로 인식하고 있으며 아디스 아바바의 정책을 계속되고 있는 외세 간섭의 역사로 바라본다.

외세 간섭과 파벌과 부족, 내부 결집의 부족으로 인한 1991년의 내전은 소말리아에 큰 상처를 남겼다. 전쟁의 상황에 몰린 민간인들이 원조마저 받지 못하게 되면서 소말리아에는 인도주의적 재앙을 가져온 극심한 기근이 닥쳤다. 1992년 12월에 “인도주의적” 목적이라는 명분으로 시작된 국제 원조는 외세의 개입-미국은 군대를 파견했다-을 숨기기 위한 의도였다. 그러한 외세 개입의 노력은 1993년 10월 1천명 이상의 소말리아 인과 18명의 미군이 모가디슈에서 사망함으로써 비극적인 결말을 맺었다.

미국이 급히 철군을 함에 따라 주류 언론은 서방이 그들 스스로 도움을 거절하는 이들을 도울 수는 없다고 합리화하였다. 이런 식민 박애주의자들은 소말리아 사람들이 무엇을 바라는지는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 후부터 국제 뉴스 미디어는 소말리아를 중요하게 다루지 않았고 논리적이지 않은 상황 설명과 시각으로 소말리아의 상황을 그저 어리석은 문제 정도로 치부해버렸다. 그러나 진실은 아프리카의 뿔에 대한 식민적 관심이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2001년 9월 11일에 있었던 테러 공격은 미국이 전략적 지역인 소말리아에 개입할 수 있도록 자극제가 되었다. 공격 한 달 뒤에 폴 월포위츠(당시 미 국방부 부장관)는 에티오피아와 소말리아의 여러 권력가들을 만나 알카에다의 테러리스트들이 라스 캄보니 등 소말리아의 영토를 탈출경로로 이용하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1년 후 미국은 상황을 ‘감시’하고 ‘반테러리즘’ 활동을 하기 위한 현지 군인들을 훈련하기 위하여 합동기동부대를 세웠다.

미국의 군사 파견단은 계속되고 있는 갈등상황에서 중립적인 역할을 하지 않았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미군은 알카에다 용의자들을 추적한다는 명목으로 2006년 12월 에티오피아 군대가 소말리아에 들어가는 것을 지원했다. 에티오피아의 점령행위는 정통성이 의심스러운 소말리아 과도 연합 정부의 요청에 따른 것으로 정당화되었다.

대부분의 구성원들이 친 에티오피아 성향인 것으로 알려진 소말리아과도연합정부는 2006년 1월 이슬람 법정 연대가 수도를 접수하고 마침내 소말리아의 많은 지역에서 안정을 확보하면서 세력이 확대된 후 소말리아 내에서 급속히 영향력을 상실했다. 미국이 지원한 에티오피아 군이 2006년 소말리아를 침공하면서 미국과 서방국가들과 대화를 하기 위한 이슬람법정연대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2007 년 1월 7일 미국은 AC-130 무장 헬리콥터를 사용한 공습을 하여 소말리아에 직접 개입하였다. 당시의 민간인 피해가 보고되었으나 미국은 그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였다.

미국과 에티오피아의 개입은 소말리아가 화합할 수 있는 기회를 망쳐놓았다. 소말리아는 이제 과도 정부와 에티오피아(둘 다 유엔과 미국, 아프리카 연합의 지지를 받는다) 그리고 이슬람법정연대(에리트레아와 몇몇 아랍 걸프 정부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고 알려져있다)로 나뉘었다. 바로 얼마 전, 유엔은 국제평화유지군의 주둔을 금지하였고 파병을 약속했던 몇몇 아프리카 국가들은(우간다를 제외하고) 아직 군대를 보내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은 소말리아를 또 한 번 외세 권력의 자비와 자기 잇속만 차리는 국내 권력 하에 놓이게 하며 소말리아에 또 다시 피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소말리아의 민중은 이미 너무 많은 고통을 받아왔기 때문에 그들의 입장에 서있는 우리의 지지가 절실하다. 그들은 극히 어려운 처지에 놓여있으며 그들에 대한 더욱 깊은 이해와 그에 따른 즉각적인 관심이 절실하다.

::글_ 람지 바라우드(www.ramzybaroud.net)는 PalestineChronicle.com(팔레스타인 이야기.com)의 저자이며 편집장이다. 그의 글은 세계적으로 많은 신문과 잡지에 실렸다. 최근에는 [팔레스타인의 두번째 인티파다: 민중의 저항에 대한 이야기]를 펴냈다.

::번역_ 수진, 2007년 12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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