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를 넘는 뉴스 1481_2735_139

Published on 4월 15th, 2013 | by 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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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글라데시] 착취받지 못하는 고통이 더 끔찍하다?

지난 연말의 일이다. 아시아의 한가운데에 자리잡은 방글라데시에서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의 대규모 시위가 터져 나왔다. 글자 그대로 ‘터져 나왔다’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게, 동남쪽 끝에 위치한 치타공 수출자유지역에서 일하던 2만 명의 노동자들이 공장 밖 거리로 쏟아져 나오면서 시작된 시위는 불과 몇 시간 만에 수도인 다카를 비롯해 나라얀간지, 가지푸르, 북동쪽의 루프간지로까지 순식간에 확산됐다.

그 기세만큼이나 시위 양상 또한 아주 격렬해, 노동자들은 전날까지 매달려 일하던 공장의 기계와 집기들을 부수고 도로를 점거한 채 쌓아놓은 타이어에 불을 질렀다. 그러자 그에 맞선 경찰들은 시위대를 향해 곤봉을 마구 휘두르고 고무탄과 최루탄을 발사했다. 그 결과는 네 명 사망, 2백 여 명 부상, 그리고 사상자 수만큼이나 많은 노동자들의 폭력연행이었다.

당시 시위는 이례적으로 국내 언론에서도 큰 관심을 보였다. 물론 노동자들이 도대체 왜 저러나 하는 관심 때문이라기보다는 시위의 맨 한복판에 영원무역이라는 한국계 의류기업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세계적인 아웃도어 브랜드인 노스페이스의 의류와 신발을 주로 생산해 판매하는 영원무역은 방글라데시에서만 17개의 공장에 4만 5천명의 노동자들을 고용하고 있는 그 나라 최대의 수출업체 중 하나다. 그런 기업에서 노동자들이 공장을 점거하고 ‘과격’시위를 벌인다 하니, 시위로 인한 조업차질과 반한감정의 확산 따위가 심히 우려됐을 게다.

대규모 시위 ‘터져나왔다’

그러나 사실 방글라데시의 2010년 12월 노동자 투쟁은 어떤 특정 기업을 상대로 한 투쟁은 아니었다. 착취도 이런 착취가 없을 정도로 살인적인 초저임금과 열악한 노동환경에 맞서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기계를 세워버리고 분노를 온 몸으로 표현한 자연적인 저항이었다.

더 구체적으로는, 1994년에 최초로 개정된 이후에 12년만인 2006년도에 딱 한번 인상된 것 말고 몇 년째 꿈쩍도 않던 한 달 1,662타카(한화 약 2만 7천원)의 최저임금 인상에 대한 정부의 인상 약속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데 대한 분노였다.

이곳 노동자들은 하루 세끼 밥이라도 거르지 않고 아이들을 초등학교에라도 보내려면 적어도 5천 타카(8만원)는 돼야 한다는 애초의 요구에서 한 발 물러나 3천 타카(4만 8천원)로 합의해줬다. 게다가 상당수 기업들은 임금 부담이 적은 미숙련공들의 임금만 올리고 숙련공들은 인상에서 제외했다. 대신 이들 기업들은 기존에 제공하던 수당을 삭감함으로써 실 수령액은 큰 차이가 없게 만드는 꼼수를 부려 노동자들의 분노를 더욱 키웠다.

설사 기업들이 최저임금을 인상한다고 해도 워낙에 천정부지로 치솟은 식료품 가격과 주택 임대료 때문에 인간다운 생활이 불가능하다는 건 정부 스스로도 인정하고 있다. 방글라데시 총리까지 직접 나서 의류노동자들의 월급이 너무나 비인간적이라며 기업들에게 그동안 벌어들인 이윤을 나눌 것을 촉구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중요한 고용과 수출 분야를 파괴해 나라 전체를 혼란에 빠뜨리고 민주주의를 되돌리려는 더 큰 음모의 일환으로 시위를 꾸미고 선동하는 이들은 본보기로 강력히 처벌하겠다”(사하라 카툰 내무장관)고 으름장을 놓는 이중플레이를 하고 있다. 이는 시위 기간에 방글라데시 의류노동자단결포럼 의장인 모슈레파 미슈라는 여성노동운동가를 연행해 지금까지 불법적으로 가둬놓고 회유와 살해협박을 가하는 식으로 현실화되고 있다.

너무 비인간적인 임금수준

그건 그렇고, 그들이 투쟁을 벌이던 무렵 국내의 한 일간지에는 이와 관련한 어느 경제학자의 글이 실렸다. 지난 참여정부에서 경제정책의 큰 틀을 짠 인물로 알려진 이정우 교수는 작년 12월 20일자 한겨레신문의 ‘이정우의 경제이야기-방글라데시 착취공장’이란 글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착취공장에 대해서는 찬반양론이 있다(중략). 착취공장의 대안은 농업인데, 하루 종일 뙤약볕에서 농사짓는 대가는 착취공장의 최저임금보다 더 낮다. 실제로 동남아의 착취공장 노동자들 중에는 가혹한 농업노동에서 해방된 것을 큰 다행으로 여기는 사람이 많다.(중략) 폴 크루그먼은 저임금 일자리라도 일하는 것이 일을 아예 못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주장한다. 같은 취지로 제프리 색스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착취공장이 너무 많아서 걱정이 아니고 너무 적어서 걱정이다.” 일찍이 진보 경제학의 거목 조앤 로빈슨 여사는 이를 더 설득력 있게 표현했다. “자본주의에서 착취받는 노동자의 고통은 끔찍하다. 그러나 착취받지 못하는 고통은 더 끔찍하다.” 착취 받지 않고 잘 사는 게 최선이겠지만 착취 받으면서라도 살 수밖에 없는 것이 자본주의의 현실이고 이런 관점에서 문제 해결을 모색해야 한다.”

아니, 착취공장의 대안이 착취하지 않는 공장이어야지, 왜 농업이란 말인가. 그리고 착취 받지 못하는 고통이 착취 받는 고통보다 더 끔찍하다니, 그럼 노동자들은 “평생 농사만 지었을 저희를 이렇게 착취해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하고 감사해야 하나. 자본과 기업이 오로지 노동자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굳이 필요도 없는 공장을 짓고 돌린다면 이정우 교수가 한 이야기가 맞을 지도 모른다.

농업노동에서 해방된 걸 다행으로 여겨라?

그러나 기업가들은 빈민 구제를 목적으로 노동자들을 고용하지는 않는다. 그만큼 기대되는 이윤이 있기 때문이고, 또 실제로 엄청난 이윤을 저임금 고용을 통해 뽑아가고 있다. 마찬가지로, 노동자들은 자신의 노동을 통해 그 이윤에 기여하고 있기 때문에 정당한 임금과 인간다운 노동환경을 보장하라고, 우리를 착취하지 말라고 요구하고 싸우는 것이다.

기아임금 수준의 저임금은 “고용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자본가 계급의 이해와 노예제도에서 벗어나 자신의 노동을 상품화하려는 노동자들의 욕구가 부합된 결과”라는 자본주의 경제학 관점에서도 정당성을 갖지 못한다. 어느 한쪽만 이익을 본다면 그 관계가 제대로 유지될 수 없으니까 말이다.

앞서 이정우 교수의 글에서 언급된 조앤 로빈슨은 이런 말도 남겼다고 한다. “경제학을 공부하는 이유는, 경제와 관련된 질문에 이미 만들어진 해답을 배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경제학자들에게 속지 않기 위해서다.”

그렇다고 우리 모두가 다른 거 다 집어치우고 경제학만 파고 들 수는 없는 노릇. 그러나 굳이 경제학을 공부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잘 안다. 착취 받으면서 사는 것이 오늘날의 자본주의의 현실이라면 그 착취를 깨부수기 위해서 싸워야지, 착취 받지 않는 고통은 더 끔찍하다고(그래서 그나마 나는 나은 거라고) 자위해서는 안 된다는 걸 말이다.

2012년 1월 28일 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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