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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shed on 4월 15th, 2013 | by 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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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테말라] 과테말라, “기억하지 않는 역사, 되풀이된다”

외국인 친구를 통해 어렵사리 구해놓고는 5년 가까이 컴퓨터 하드디스크 깊숙한 곳에 모셔만 놓았던 다큐멘터리 영화 한 편을 며칠 전 드디어 보게 됐다. 제목은 (When the Mountains Tremble).

이 작품은 마야 선주민의 후손으로 노벨평화상(1992년)까지 수상한 리고베르따 멘추(Rigoberta Menchu Tum)의 나레이션으로 더 유명해졌다. 영화는 전 세계인들에게 과테말라 내전의 충격적인 실상을 전달했던 그녀의 증언록 (Me llamo Rigoberta Menchu)의 첫 머리와 마찬가지로 “지금부터 들려드릴 저의 이야기는 모든 과테말라 민중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라는 독백으로 시작한다.

농장에서 노예처럼 일하던 어린 남동생 두 명을 각각 농약 중독과 영양실조로 잃고, 대지주에게 강제로 땅을 빼앗길 처지에 몰린 아버지는 다른 농민들과 함께 스페인 대사관을 점거했다가 경찰이 고의로 지른 불에 타죽었으며, 남은 오빠마저 반군에게 협력했다는 누명을 쓰고 군인들에 의해 산 채로 불태워지는 광경을 강제로 지켜봐야 했던 그녀의 기구한 삶. 그리고 그런 그녀의 삶은 실제로 당시 과테말라의 가난한 민중 모두의 삶을 짓누르던 폭력과 학살의 광기와 정확히 겹쳐진다.

중앙아메리카의 과테말라, 36년 내전과 독재로 씻을 수 없는 상처 입어

그도 그럴 것이, 1960년부터 1996년까지 36년간 지속된 과테말라 내전 과정에서 숨진 사람들의 수만 따져도 어림잡아 20만 명. 그밖에 어디론가 끌려가 생사조차 알 수 없는 실종자가 5만 명, 고문과 폭력으로 인해 오늘날까지 신체적 · 정신적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또 수십 만 명이라고 하니 1천3백만 과테말라 국민 가운데 독재와 내전의 상흔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봐도 좋을 정도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겨준 비극적인 역사의 배경에는 땅과 인종주의, 그리고 이념 대립이 자리잡고 있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과테말라의 독재자 마누엘 에스트라다 카브레라(Manuel Estrada Cabrera)는 가난한 농민들의 땅을 빼앗아 소수의 대지주들과 미국의 유나이티드 프루트 사(社)를 비롯한 외국 투자자들에게 ‘골고루’(?) 나눠주는 정책을 폈다. 그리고는 ‘짐승보다는 조금 낫지만, 그렇다고 사람은 아닌’ 마야 선주민들을 강제로 데려다가 바나나와 커피 농장에서 노예처럼 부리게 했다.

그러던 중 1944년, 전국적인 총파업과 농민들의 시위로 독재정권이 쫓겨나고 역사상 처음으로 국민들의 자유로운 선거를 통해 후안 호세 아레발로(Juan Jose Arevalo)와 하코보 아르벤스 구스만(Jacobo Arbenz Guzman) 정권이 잇달아 들어섰다. 훗날 이야기하는 ‘십 년 간의 봄’이 시작된 것이다. 이 기간 동안 정부는 노동조합을 합법화하고 선주민들의 권익을 향상시키는 제도를 도입하는 한편, 대지주들과 외국 자본으로부터 토지를 사들여서 국유화하는 등의 대대적인 민주화와 개혁 정책을 폈다.

‘십 년 간의 봄’ 이후 1954년 군사 쿠데타로 다시 혹독한 겨울…
쟁기 대신 총을 잡을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

그러나 불행히도 당시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동서냉전이 막 본격화하던 시점이었다. 미국의 정책 입안자들에게 토지개혁이니 정치적 민주화니 민족자본 육성 따위를 외치는 자들은 죄다 빨갱이 공산주의자들로 보이던 시기가 바로 그때였던 것이다. 게다가 자칫하면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주인에게 돌려줘야할 상황에 처한 유나이티드 프루트 사는 미 고위관료들과 정치인들의 옆구리를 연신 쿡쿡 쑤셔댔다.

결국 1954년 미 중앙정보부(CIA)가 훈련시킨 망명객들을 주축으로 한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 과테말라의 민주 정부는 모래성처럼 무너져버렸다. 정부가 계획했거나 진행 중이던 개혁과 민주화 조치들이 모두 원점으로 되돌아간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고 말이다.

10년 간의 짧았던 봄이 그렇게 허망하게 물러가고, 다시 혹독한 겨울이 찾아왔다. 앞장서 변화와 개혁을 이끌었던 정치인과 활동가들은 하나둘씩 암살당하거나 어디론가 끌려갔고, 그나마 가까스로 살아남은 사람들은 나라 밖으로 서둘러 몸을 피했다(훗날 쿠바 혁명에 참여한 아르헨티나 출신의 체 게바라도 그 중 한 명이었다).

이제 남은 이들은 조상 대대로 살아온 땅을 차마 떠날 수 없는, 아니 떠나려야 떠날 곳도 없는 가난한 민중뿐이었다. 그러나 인간다운 삶에 대한 꿈을 이대로 포기하기에는 그들의 간절한 열망이 너무 컸다. 어느덧 쟁기 대신 총을 움켜쥔 사람들이 하나둘씩 늘어나기 시작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모두가 예상하듯이, 그런 민중에 대한 군부 독재정권의 대응은 지독하고도 잔인했다. 그 중에서도 1982년부터 1983년까지, 2년도 채 되지 않는 짧은 기간 동안 집권했던 에프라인 리오스 몬트(Efrain Rios Montt) 장군은 반군 게릴라의 거점이 될 만한 지역에 사는 젊은 남성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고 집과 논밭을 모조리 태워버리는 ‘초토화 정책’(Scorched Earth policy)으로 악명 높았다. ‘살인기계’를 자처하던 민병대와 정부군은 가는 곳마다 살인과 고문, 강간을 저질렀고, 심지어는 자식에게 부모를 죽이도록 강요하기까지 했다. ‘하느님도 혁명과 공산주의는 싫어하신다’고 스스로를 정당화하면서 말이다.

탈냉전과 민주화 시대 맞아 … 과테말라 가톨릭교회, 내전 종식의 중재자로 나서
독재정권 피해자 5만5천 명 이야기 문서로 엮은 ‘역사적 기억의 회복’ 프로젝트

그리고 또 시간이 흘렀다. 어느덧 냉전은 막을 내렸고, 주변 중남미 국가들의 친미 독재정권들은 하나둘씩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갔다. 모두가 폭력과 죽음에 넌더리를 내고 있었고, 하루라도 빨리 내전과 독재가 끝이 나기를 바랐다. 독재자와 그 하수인들도 언제까지나 물리적인 폭력만으로 권력을 이어가기가 불가능한 시대가 왔음을 깨달았고, 반군은 반군대로 무장항쟁으로 독재자를 끌어내리기엔 그들이 너무나 미약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양쪽 모두 손에 든 총을 먼저 내려놓으려 하지는 않았다. 그때 중재자를 자임하고 나선 곳이 가톨릭교회였다. 과테말라 주교회의는 로돌포 께사다 토루뇨(Rodolfo Quezada Toruño) 주교(훗날 추기경으로 서임)와 후안 헤라르디 꼬네데라(Juan Jose Gerardi Conedera) 보좌 주교를 국가화해위원회에 파견해 양측을 설득하는 작업을 맡겼다. 그리고 1996년 12월, 드디어 역사적인 평화협정이 체결되고 36년에 걸친 내전이 막을 내렸다.

물론 그것만으로 모든 게 끝난 건 아니었다. 단지 협정문서 하나만으로 지워버리기엔 사람들의 기억과 가슴속에 남은 상처가 너무나 깊고 선명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아버지, 오빠, 누이가 어디서, 누구에 의해, 어떻게 고통 받고 죽어갔는지, 그 진실을 파헤쳐 살아남은 가족들에게 전달하는 일은 그 상처를 조금이라도 아물게 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치유 의식과도 같은 것이었다. 게다가 그렇게 인간 이하의 몹쓸 짓을 한 가해자들이 시대적 상황이라는 보호막 뒤에 숨어서 아무런 반성도, 죗값도 치르지 않게 놔둔다면 피해자들의 상처는 영원히 아물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1995년부터 시작한 ‘역사적 기억의 회복’(REMHI) 프로젝트에 박차를 가했다. 전국 방방곡곡에 자원활동가 8백 명을 파견해 5천여 명의 증언을 모아서 피해자 5만5천 명의 사례를 문서로 정리하는 방대한 작업을 진행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결과물이 바로 1998년 4월 24일에 주교회의가 발표한 네 권 분량의 진실보고서 (Guatemala: Nunca Mas)였다.

진실보고서 발표 이틀만에 살해당한 꼬네데라 주교…
지난 6월 4일 선종한 토루뇨 추기경을 추모하며

보고서 발표 이틀 뒤, REMHI 프로젝트를 진두지휘했던 꼬네데라 주교가 자신이 살던 성당 차고에서 구타당해 숨진 채로 발견됐다. 훗날 밝혀진 바에 따르면, 꼬네데라 주교와 같이 살던 마리오 오란테스(Mario Orantes) 신부와 전직 군 장교 3명이 저지른 범행이었다.

이제 2012년 현재로 돌아와, 꼬네데라 주교와 함께 역사적인 평화협정을 성사시키고 뒤이은 진실규명과 피해자 치유 활동을 이끌었던 토루뇨 추기경이 지난 6월 4일 여든 살을 일기로 선종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생전에 ‘평화의 추기경’(El Cardenal de la Paz)이란 별칭으로 라틴아메리카 전역에 걸쳐 널리 존경받던 토루뇨 추기경의 죽음에 과테말라 정부는 사흘간의 애도기간을 선포했다. 마침 올해 1월에 마지막 남은 독재자 리오스 몬트를 대량학살과 반인도적 범죄 혐의로 재판정에 세우기로 한 법원의 결정이 내려진 터라 추기경을 떠나보내는 과테말라 국민들의 아쉬움은 더욱 컸을 것이다.

생전에 군대가 동료 사제 12명을 살해하는 현실을 목격했으며, 가장 가까웠던 보좌 주교까지 폭력에 희생돼 비명횡사하는 걸 고스란히 지켜봐야 했던, 그래서 그 자신도 독재와 폭력의 피해자라고 할 수 있는 토루뇨 추기경. 그가 가시는 길에 명복을 빌면서,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격언과 함께, 오랜만에 전두환과 노태우의 얼굴을 떠올려본다.

2012년 6월 22일 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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