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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shed on 4월 15th, 2013 | by 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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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아이티 지진, 자연이 아닌 역사가 만들어낸 참사

지난 1월, 아이티에서 지진이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내가 아이티에 대해 갖고 있던 이미지는 ‘진흙 쿠키’를 만드는 흑인여성의 모습이었다. 재작년 초에 전 세계적으로 곡물가격이 급등하면서 밀이나 옥수수, 쌀 등을 주식으로 하는 나라들 중 자급자족률이 낮은 국가들에 식량 위기가 닥쳤다. 아이티도 그 중 한 곳이었는데 특히 가난한 사람들이 식량을 살 돈이 없어 배고픔을 견디다 못해 진흙에 소금을 넣어 구운 과자를 사먹는 모습과 대통령 궁 앞에서 격렬한 시위가 벌어져 사망자가 발생했다는 소식이 언론에 크게 보도되었다. 하지만 당시에 식량위기를 겪는 국가들이 한둘이 아니었으므로 곡물가격이 급등한 이유나 많은 국가들이 동시에 국제 곡물가격 급등에 취약한 전반적인 이유들에 더 관심이 컸지, 아이티가 왜 특히나 더 빈곤한 상황에 놓일 수밖에 없었는지는 자세히 알아보지 못했다. 다른 중남미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외세의 개입과 국내 정치의 혼란 때문일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했었는데, 그러한 상황이 강도 7.0의 지진으로도 23만 명의 목숨을 앗아가고 백만 명을 이재민으로 만드는 끔찍한 결과를 가져올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노예들의 독립 국가

아이티는 1804년 프랑스의 식민주의 점령에 맞선 흑인 노예들의 독립투쟁의 결과로 탄생했다. 식민 억압에 맞서 흑인들이 이뤄낸 세계 최초의 독립 국가이며,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독립을 이룬 나라이다. 아이티 민중들에게 아이티의 독립은 큰 자부심을 가질만한 역사이지만 프랑스에게는 굴욕을, 미국에게는 자신들이 부리는 흑인 노예들이 아이티의 영향을 받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안겨주었다. 프랑스와 미국뿐 아니라 식민지를 두고 있던 강대국들은 모두 같은 심정으로 아이티를 독립된 국가로 인정하지 않았다. 때문에 아이티는 독립 이후 그 누구의 도움이나 협력도 없이 철저히 고립된 채 정말로 ‘독립적’으로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프랑스는 아이티의 독립으로 재산 손해를 봤다며 신생국가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비용을 배상금으로 요구했다. 바티칸 교황청마저도 아이티가 독립을 선포하자 파견되어있던 사제들을 모두 철수시켰다.

아이티를 ‘식인종들의 국가’라고 폄훼하던 미국은 독일이 아이티에 개입을 시도하자 이를 계기로 1915년에 아이티를 침공하여 1934년까지 사실상 점령하여 아이티의 사회, 경제구조를 미국식으로 개조하기 위해 노력했다. 당시 미국 내에서 벌어진 반점령 연대투쟁과 아이티 주둔 비용으로 말미암은 경제적 부담으로 미국은 아이티에서 철수했지만, 1959년 쿠바에서 혁명이 성공하자 아이티에 쿠바의 영향력이 미치는 것을 우려해 또다시 아이티를 점령할 방법을 모색한다. 마침 아이티는 1957년에 치러진 첫 번째 보편적 일반선거에서 당선된 듀발리에가 대통령 종신제를 선포하고 독재를 이어가던 상황이었다. 미국은 다른 나라에서도 그러했듯이 주저 없이 듀발리에 독재정권에 경제, 군사적 원조를 지원했다. 듀발리에의 독재는 아들 듀발리에로 세습되었고, 미국은 1986년에 대규모 민중봉기로 독재정권이 몰락하자 아들 듀발리에를 피신시켜 망명을 도왔다.

그 후 아이티는 수십 차례의 쿠데타가 반복되며 혼란한 정치 상황이 이어졌고, 빈민촌을 중심으로 ‘작은 사제’로 불리며 민중의 지지를 받아온 아리스티드가 1990년에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지만 1년도 되지 않아 독재시절의 주역들이 일으킨 쿠데타로 국외 망명에 올라야했다. 하루아침에 자신들이 선택한 대통령을 빼앗긴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되찾기 위해 투쟁을 벌였으나 쿠데타 군부의 탄압으로 3년간 약 1만 명 이상이 살해되거나 실종되었으며 수십만 명이 작은 보트에 의지한 채 아이티를 떠나 바다를 건너야 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유엔은 경제제재를 통해 군부를 압박한 뒤, 다국적군을 파견해 군부를 몰아내고 아리스티드를 다시 복귀시켰다. 하지만 이 뒤에는 미국의 계산이 깔려있었다. 쿠데타 지원 의혹을 받고 있던 미국은 비공식적으로 아리스티드에게 복귀 후 미국이 요구하는 경제 개혁을 실시하도록 조건을 제시했다. 우여곡절 끝에 아이티에 돌아가 1년 남은 임기를 끝마친 아리스티드는 2000년 11월에 다시 대선에 도전하여 91.8%라는 압도적인 지지율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아이티 인구의 90% 가량이 빈곤층에 속하니 충분히 가능한 계급투표의 결과였다. 하지만 또다시 아리스티드는 2004년에 쿠데타로 대통령직을 빼앗기고 비행기에 태워져 중앙아프리카로 보내졌다. 이번에는 미국이 지원의 차원을 넘어 공항을 통제하고 미 정보국 요원이 아리스티드의 납치에 동행하는 등 공모의 수준으로 쿠데타에 개입한 증거들이 폭로되었으나, 미국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유엔을 움직여 아이티에 유엔평화유지군을 주둔시키고 새로운 대통령 선거를 실시했다.

실패한 국가?

이러한 역사적 과정을 겪으며 아이티는 서방세계의 기준으로 ‘실패한 국가’가 되었다. 이번 지진 발생에 아이티가 취약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바로 역사적 배경 때문이지, 아이티 민중들이 무능하거나 의식 수준이 낮아서가 아니었다. 1980년대 자급자족이 가능했던 주식인 쌀은 미국이 강요한 농산물 시장 개방으로 1990년대 이후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해왔다. 농촌의 몰락으로 농촌을 떠나 도시에 몰린 인구는 커다란 빈민가를 형성해 얼기설기 지은 집을 층층이 쌓아 살았고, 이 때문에 지진으로 인한 인명피해가 커졌다. 농업뿐 아니라 주요 산업이 사유화되고 개방되어 시멘트를 만들었던 공장은 수입한 시멘트를 포장하는 공장으로 바뀌었고, 외국 자본이 운영하는 의류공장에서는 노동자들이 터무니없는 노동 환경에서 최악의 저임금을 받으며 선진국으로 수출될 옷을 만들었다. 아이티 사람들을 위한 물건을 생산하는 공장이 없으니 다수가 빈민인 아이티인들이 접근할 수 있는 물자의 양은 극히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정치적 불안정과 불평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온 풀뿌리 사회운동 조직들은 ‘반정부 세력 소탕’ 또는 ‘조직 폭력배 소탕’이라는 명목으로 탄압받고 축소되었다. 서구 정부들과 구호단체들은 마치 아이티에는 어떠한 주민 자치 조직도, 시민사회의 영역도 없는 듯이 이들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아이티의 지진으로 인한 엄청난 인명피해와 구호물자의 부족이 자연재해와 고질적인 빈곤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고 포장되어 왔지만, 실제로 아이티 지진 참사는 국제사회가 만들어낸 인재였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과거의 역사가 아닌 현재 진행형이라는 것이다. 지진 발생 후 국제사회가 아이티에 내린 처방은 이전의 맥락과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구호와 재건의 과정에 아이티 인들의 의사는 조금도 고려되지 않은 채, 모든 것이 강대국의 필요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다. 가장 시급한 식량과 물, 의약품보다도 군대의 파병을 내세운 각국 정부와 유엔의 태도가 이를 명백하게 보여준다. 하지만 그 누구에게도 다른 이의 미래를 멋대로 재단하고 결정할 권리는 없다. 아이티의 미래도 마찬가지이다.

2010년 2월 22일 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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