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를 넘는 뉴스 7330_19104_166

Published on 4월 15th, 2013 | by 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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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쌍용차 투쟁 3년, 죽음을 넘어 희망의 연대로

“동료들을 하나하나 보낼 때마다 피눈물이 납니다.
그렇지만 결코 눈감거나 고개 돌리지 않고 똑바로 바라보려 합니다.
우리가 무섭다고, 미안하다고 한숨짓고 있을 때 죽음의 숫자는 더욱 더 늘어나기 때문입니다.

이제 숨을 쉬고 싶습니다.
우리도 살아야 합니다.
고통스럽지만 똑바로 바라보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죽음에게 죽음을 선언합니다.”

스물두 번째로 세상을 떠난 동료의 영정을 손에 들고 서울역 광장 앞 무대에 오른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고동민 씨는 먼저 간 동료들의 이름을 하나, 하나 부르며 눈물을 참지 못했다. 우리도 살아야 한다고, 죽음을 딛고 일어서야 한다고, 온 마음을 담아 외치는 그의 목소리에서 지난 3년 간의 긴 힘겨움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3년 전, 2009년 5월 22일 고동민 씨는 700여 명의 동료 노동자들과 함께 평택 쌍용차 도장2공장을 점거했다. 전체 7,179명의 노동자 중 무려 2,646명을 정리해고하겠다는 회사에 맞서 대화를 요구하기 위해서였다. 700명으로 시작한 공장 점거는 한 때 2,000명의 노동자들이 들어와 있을 정도로 참여 열기가 높았다. 쟁의행위 결의 투표에서 찬성 86.1%라는 숫자가 괜히 나온 것이 아니었다.

공장을 점거하면서 고동민 씨는 처음으로 노동조합 간부가 되었다. 회사는 그를 ‘강경파’로 낙인찍어 웬만한 노동자들은 다 받아봤다는 회유와 협박도 걸어오지 않았다. 그가 처음부터 ‘강경파’ 노조원이었던 건 아니었다. 쌍용차에 입사하기 전, 연극배우로 활동했던 그는 노동운동보다는 문화 활동에 관심이 많았다. 7년 간 체어맨과 로디우스 차량의 내부조립공정 파트에서 일하는 틈틈이 동료들과 연습해 ‘근로자 연극제’에 나가기도 했다. 노조 문화국 활동을 도와주는 것이 조합원 활동의 전부였던 그가 강경해진 것은 회사가 왜 어려워지게 되었는지 제대로 이해하면서부터였다.

IMF 이후 경영위기를 겪은 쌍용차는 2005년 1월, 5년 만에 워크아웃을 졸업하고 경영이 정상화되는 듯싶었다. 그러나 한국 정부 주도로 헐값에 쌍용차를 인수한 중국 기업 상하이차는 많은 이들이 우려했던 대로 쌍용차에 대한 투자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오히려 쌍용차의 핵심기술을 중국으로 빼돌렸다. 2006년에는 경영악화의 책임을 노동자들에게 돌려 432명을 희망퇴직시키고 554명을 정리해고하는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상하이차는 노조가 구조조정을 반대하면 아예 철수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많은 노동자들은 회사가 어렵다는 데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해왔던 것처럼 열심히 일하면 상황이 곧 나아질 거라 기대했다.

그러나 2009년 1월 상하이차는 쌍용차를 매입한 지 4년만에 법정관리를 신청하고 경영권을 포기했다. 말 그대로 ‘먹튀’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였다. 몇 년째 반복된 공장휴업과 법정관리 이후 월급이 반에 반 토막이 나면서 생활고를 겪고 있었던 노동자들은 어떻게든 회사를 살려보려고 근무시간을 줄이고 일자리를 나누는 것으로 총고용을 유지하고, 노조가 비정규직 고용안정을 위해 12억 원을 출연하고, 신차개발기금으로 1,000억 원을 담보하겠다는 등의 조치를 발표했다. 여기에 대한 회사측의 답은 전직원의 40%에 해당하는 2,646명의 정리해고였다. 기업과 정부의 말도 안 되는 놀음에 세 아이의 성실한 아빠이자 연극을 좋아하는 섬세한 감정의 소유자였던 고동민 씨는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열혈 투사가 되었다.

“처음 해보는 노조 간부일이라 강경해질 수 있었던 것 같다. 다른 것 재지 않고 오로지 정당한 파업에 대한 자부심이 전부였으니까. 내 삶에서 이건 꼭 이기고 말겠다는 의지가 강했다.”

고동민 씨뿐만이 아니었다. 공장을 점거한 동료들은 모두 “꼭 승리하겠다는 의지로 하나같이 빛나던 사람들”이었다.

“공장 밖에서는 회사 측의 단수와 정전, 음식물 반입 금지 조치, 경찰의 침탈 시도와 과도한 폭력으로 공장 안의 상황이 굉장히 힘들 거라고 생각했겠지만, 사실 우리는 해방감을 느끼고 있었다. 공장이 우리, 노동자의 것이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비해고자(해고당하지 않은 노동자)의 파업 동참은 공장 안에 고립되어 있던 노동자들에게 큰 의지와 희망이 됐다. 굳이 공장에 들어오지 않아도 되는, 회사가 시키는 대로 파업 참가자들을 공격하는 구사대가 되지 않고 집에만 가만히 있었어도 되는 사람들은 ‘함께 살자’고 외치며 공장에 들어와 함께 싸웠다. 정리해고에서 살아남은 ‘산 자’들은 파업이 끝나던 날까지 120명이 남아있었다. 정당한 싸움을 위해 함께 한다는 것은 ‘산 자’와 ‘죽은 자’ 모두에게 자존감과 자긍심을 갖게 했다.

공장 점거 파업이 시작되고 10여 일 뒤에는 노동자들의 집으로 해고통지서가 들어있는 우편물이 도착했다. 해고통지서도 고동민 씨의 마음을 흔들지는 못했다. 미리 예상을 했던 일이기도 했지만 해고가 됐으니 고민할 것 없이 그냥 싸움을 계속하면 됐다. 그렇게 단단했던 고동민 씨의 마음을 무너뜨렸던 것은 뜻밖에도 공장 밖에서 들려오는 죽음의 소식들이었다.

2009년 5월 27일, 비해고자였던 41살의 엄 모 씨가 스트레스로 인한 뇌출혈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는 이 죽음이 해고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크게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곧이어 구조조정의 압박으로 인한 스트레스로 또 한 명의 노동자가 죽음을 맞았고, 생활고에 못 이긴 노동자는 연탄불을 피워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7월 20일에는 노조 간부의 아내 박 모 씨가 숨졌다. 두 달 동안 4번의 죽음을 마주하면서 고동민 씨는 그 동안 외쳤던 ‘해고는 살인이다’는 구호가 더 이상 구호가 아닌 현실이 되었음을 깨달았다.

“아직도 엄마를 잃은 그 집 아이들의 얼굴을 쳐다보지 못한다. 너무 미안해서 눈을 마주칠 수가 없다.”

회사는 점거 파업이 장기화되자 파업에 참가하고 있는 노동자들의 아내와 자녀, 노부모에게까지 전화를 걸거나 직접 방문해 손배가압류, 고소고발, 벌금, 구속 등의 협박을 해왔다. 협박과 회유에 못 이겨 점거를 그만두고 공장에서 나간 노동자들에 대해서는 곧바로 경찰의 조사가 시작됐다. 경찰은 공장 안에서 누구와 무엇을 했는지 말하면 구속을 면하게 해주겠다고 다그쳤다. 그렇게 회사와 경찰의 공조 하에 “자긍심과 자존감이 있던 사람들이 피폐해지고, 스스로 자존감을 버리게 만들었다.”

77일간의 공장 점거는 회사와 노조의 협상으로 파업에 참여했던 1천여 명에 대해 48% 무급휴직, 52%의 희망퇴직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끝났다. 무급휴직자들은 1년 뒤 회사 경영상태가 양호해진다는 전제 하에 회사에 복귀하고, 파업 참가자들에 대한 기소와 손배가압류를 취하하기로 회사는 약속했다. 그러나 경찰은 파업 노동자들에게 용산참사 때와 같이 경찰특공대를 실은 컨테이너와 헬기를 동원한 살인적인 진압을 가했다. 고동민 씨를 비롯한 파업 주동자 16명은 경찰에 기소돼 징역형을 받았다.

6개월의 징역을 살고 나온 고동민 씨와 동료들을 기다린 것은 회사 측의 손해배상청구와 복귀 약속 파기, 그리고 계속되는 동료들과 그 가족들의 죽음이었다. 무급휴직 상태인 사람들은 아르바이트와 일용직 등으로 생계를 이어가며 복귀를 기다리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희망퇴직을 한 사람들의 형편도 마찬가지였다. 쌍용차에서 일했다는 경력 때문에 취직하지 못했다. 쌍용차 노동자들은 더 이상 하염없이 기다릴 수 없어 다시 거리에서의 싸움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들의 싸움판은 더 넓어졌다.

“2010년 2월에 24명이 연행된 적이 있었는데 신문에 한 줄도 나오지 않았다. 우리가 고립되어 있다는 것을 크게 느꼈다. 그러다 2011년 한진 희망버스를 타면서 이것이 우리들만의 싸움이 아니라 재능교육, 콜트콜텍, 현대차 비정규직, 유성, KEC, 코오롱 등 해고에 맞선 모든 노동자들의 투쟁인 것을 느꼈다. 우리가 해고에 맞선 노동자들의 울타리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쌍용차 노동자들은 스스로 연대의 울타리가 되어 비슷한 이유로 거리에서 싸우는 노동자들과 손을 잡았다. 어느 한 곳의 문제가 해결된다고 해서 정리해고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정리해고를 가져오는 사회 구조를 바꾸지 못한다면 언제라도 다시 정리해고의 위협을 받을 수밖에 없다. 쌍용차 노동자들은 올해 2월 ‘희망뚜벅이’라는 이름으로 자신과 같은 처지에 놓인 노동자들, 지지자들과 함께 13일 동안 재능교육 농성장을 출발해 300킬로미터를 행진하며 곳곳의 장기투쟁농성장을 서로 방문하고 힘을 북돋았다. 3월에는 ‘희망광장’을 내걸고 시청 앞 서울광장에 텐트를 치고 17일간 농성했다. 아직 모두의 희망인 정리해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았지만 연대의 효과는 벌써부터 드러나고 있다.

스물두 번째 죽음을 맞이한 쌍용차 노동자들이 대한문 앞에 분향소를 설치하자 ‘희망뚜벅이’로서 함께 행진하고 텐트를 쳤던 이들이 제일 먼저 달려와 분향소를 지켰다. 매일같이 경찰의 분향소 철거 시도에 맞서다 연행되고 구급차에 실려 갔던 이들이 바로 이번 봄에 새로운 연대로 인연을 맺은 다른 회사 동료들이었다.

“최근에 쌍용차 노조 조합원 김정욱 씨와 이창근 기획실장이 경찰에 연행되었을 때는 하룻밤 사이에 4천 장이 넘는 탄원서가 도착했다. ‘희망뚜벅이’를 같이 했던 사업장에서 밤새 800장, 1,000장 씩 서명을 받고 아침에 팩스로 넣어준거다. 자발적인 연대가 희망뚜벅이와 희망광장의 가장 중요한 성과다.”

해고와 죽음을 이야기하며 어두웠던 고동민 씨의 얼굴이 조금 밝아지고 눈이 반짝였다. 그가 매일 밤 차가운 길바닥에서 자고 분향소를 지키면서도 틈만 나면 더 어려운 상황에 놓인 다른 해고자들의 농성장을 찾아다니는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이제 알겠다. 이것이 바로 희망과 연대가 만들어낸 기적일 것이다. 이 기적은 고동민 씨가 절대 놓지 않을 그 소원을 꼭 이루어지게 할 것이다.

함께 싸웠던 형, 동생들이 다시 작업복을 입고 공장에 돌아가 일상을 회복하는 것. 우리가 희망과 연대의 끈을 놓지 않는 한 그의 소원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과 연대하는 방법]

1. 가장 필요한 것은 연대의 마음! 서울 대한문 앞을 비롯해 각 지역에 설치된 분향소를 찾아 응원의 말을 전한다.

2. 대리운전을 이용할 때에는 잊지 말고 1577-6406(참 대리운전). 1만 원당 1,500원이 쌍용노동자들에게 전달된다.

3. 더욱 화끈한 연대는 입금으로! 후원계좌 농협 351-0156-5171-53 김남오

2012년 5월 22일 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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