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를 넘는 뉴스 200911_protest

Published on 4월 15th, 2013 | by 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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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그들을 후지다고 말할 자 누구인가-필리핀 마귄다나오 학살에 관한 단상

얼마 전 한 식당에서의 일입니다. 국수와 파전에 막걸리를 파는 그 식당은 탁자 사이 간격이 좁아서 굳이 귀를 쫑긋하지 않아도 옆 자리의 이야기가 그대로 귓전에 흘러드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그 날도 제 또래의 남자 셋이서 막걸리를 주거니 받거니 하며 대화에 한창이었는데, 주로 목소리 굵은 남자가 열변을 토하고 나머지 둘은 고개를 끄덕이거나 그 남자에게 되묻는 식이었습니다. 듣자하니 그 남자의 요지는 한국사회 이대로 가다간 필리핀 꼴 난다 이더군요. “에이, 필리핀은 국민성이 후져서 그런 거지, 우리는 그래도 국민들 수준이 있는데 그렇게 될까?” 둘 중 하나가 반문을 하자 그 남자는 “물론 그렇긴 하지만, 지금처럼 양극화와 사회갈등이 점점 심각해지면 우리 국민성이 아무리 뛰어나도 결국 필리핀 꼴이 날 지도 모른다는 거지”라며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짓습니다.

그 날 그들 셋이 동의한 전제였던 “후진” 필리핀에서는 요즘 정말로 “후진” 사건 하나 때문에 나라 전체가 흉흉합니다. 지난 11월 23일 필리핀 남쪽 끝에 위치한 민다나오 섬의 마귄다나오 지방에서 약 백 여 명의 무장괴한들이 민간인 수십 명이 탄 차량을 습격해 무참히 살해한 뒤 암매장한 사건이 발생한 거죠. 검경 조사팀이 암매장 장소를 발굴해보니 무려 57구의 시체가 쏟아져 나왔는데, 그 중 일부는 심한 고문을 당한 듯 팔다리가 잘려진 채 였다고 합니다. 그 날 살해된 이들은 내년 5월에 있을 지방 선거에 주지사로 출마하는 이스마엘 만구다다투 라는 지역 정치인의 부인과 여동생들을 비롯한 친인척, 지지자들과 취재를 위해 동행한 기자들이었다고 합니다.

범행을 저지른 자들이 누구인지를 밝혀내기는 어렵지 않았습니다. 평소 만구다다투 후보는 그 지방의 현 주지사이자 라이벌 후보인 안달 암파투안 측으로부터 후보에 출마할 경우 그냥 두지 않겠다는 살해 협박을 받고 있었고, 그래서 후보 신청서를 접수하러 가던 그 날도 만구다다투 후보는 살해 위협 때문에 부인과 지지자들을 대신 보낸 것이었습니다. 희생자들의 절반가량을 차지한 기자들은 그날 분명 무슨 일이 벌어질 거라고 예상해 취재에 나섰다가 불행히도 그 예상이 잔인하게 들어맞는 바람에 함께 희생된 거였구요. 즉, 그 날의 학살을 저지른 이들은 바로 암파투안 현 주지사에 의해 고용된 갱들이었던 것입니다.

그 뒤 이어진 검찰 조사에서도 그러한 혐의는 속속 사실로 밝혀지게 됩니다. 필리핀 검찰은 암파투안 주지사의 아들인 안달 암파투안 주니어를 학살을 계획하고 주도한 혐의로 기소하고, 학살에 가담한 갱단 단원들 일부를 체포해 구금했습니다. 그리고 글로리아 마카파갈 아로요 대통령은 나머지 갱단을 일망타진한다는 명분으로 한 때 그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기도 했습니다. 필리핀에서 계엄령이 선포된 건 독재자 마르코스의 집권기 이래 30여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하네요.

이즈음에서 다시 국수집 이야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아마 그 날 제 옆자리에 있던 그 세 남자가 이 뉴스를 들었다면, 거 보란 듯 “역시 필리핀은 후진 나라야”라며 고개를 끄덕였을 지도 모릅니다. 제발 한국이 필리핀처럼 되지 않기를 빌면서 말이지요. 그러나 한 나라에 살고 있는 그 수많은 사람들의 각자의 개성과 습성을 단일한 국민성이라는 범주로 묶는 것이 과연 가능하고 온당한가 하는 문제는 제쳐두더라도, 저는 필리핀 국민들이 후지다는 그들의 전제에는 전혀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설사 필리핀이란 나라에 ‘후지다’는 딱지를 붙인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 민중들이 아니라 그 나라의 정치와 경제, 계급 구조에 붙여져야 한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거의 1억에 가까운 인구가 살고 있는 필리핀은, 그러나 약 2백 여 개의 유력 가문들이 나라 전체의 정치와 경제 권력을 완전히 틀어쥐고 있는 나라입니다. 그들은 대규모 토지와 대농장, 기업체를 발판삼아 중앙과 지방의 정치와 행정을 마음대로 쥐락펴락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대해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하거나 걸림돌이 되는 이가 있다면, 자신들이 거느리고 있는 사병과 갱들을 동원해서 살해하거나 납치해서 고문을 하고 협박을 가합니다. 여기엔 노동운동가, 농민, 인권운동가, 교수, 변호사, 심지어 성직자까지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들끼리는 그 때 그 때의 필요에 따라 때로는 경쟁하고, 때로는 서로 끌어주고 당겨주면서 부와 권력을 대대손손 이어가는 거죠. 단적인 예로, 독재자 마르코스를 비롯해 그를 끌어내리고 대통령이 됐던 코라손 아키노, 현 대통령인 아로요 등이 모두 그 2백여 ‘로열패밀리’에 속한 이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필리핀 국민들 중에는 마귄다나오 지방에서 주지사로 있는 동안에만 무려 2백 명이 넘는 사람들을 납치해 살해한 것으로 알려진 암파투안 가문이 이번 학살 사건으로 인해 패가망신할 거라고 믿는 사람들은 거의 없습니다. 그동안 암파투안 가문이 현 대통령인 아로요 가문과 끈끈한 동맹관계를 맺어 온 점에 비춰 볼 때, 과거에도 그랬듯이 이번에도 여론이 잠잠해지면 ‘국민 통합’을 내세워 슬그머니 주동자들을 풀어주고 암파투안 가문은 다시 지역에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활개를 치고 다닐 거라는 거죠.

물론 그런 불합리한 구조를 바꾸지 않은 건 결국 국민들 책임이 아니냐는 반문도 가능할 겁니다. 그러나 그런 구조에 기생해 알량한 떡고물이나 챙기려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 구조를 깨뜨리기 위해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죽음을 마다않고 싸우는 수많은 필리핀 민중들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매년 정치 살해로 희생되는 사람들이 수천 명에 달하고 총 맞을 각오를 해야 노조를 만들 수 있는 나라에 살면서도 그 나라 노동자, 농민들은 스스로를 각성시키고 조직하며 자신들의 권리를 되찾기 위한 싸움을 멈추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곁에는 인권, 평화, 생명의 가치를 지켜내기 위한 인권활동가, 지식인, 성직자들이 역시 죽음과 탄압에 굴하지 않고 현장을 뛰어다닙니다. 자, 이러고도 필리핀 민중들을 감히 ‘후지다’고 할 수 있을까요? 단지 살기 위해서 망루에 올라갔다가 불에 타 숨진 철거민 다섯 명의 시신조차 일 년 가까이 차가운 냉동실에 방치하고 있는 ‘우리들’이 말입니다.

2009년 12월 17일 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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