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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shed on 9월 12th, 2013 | by 경계를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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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데타냐 또 다른 혁명이냐, 이집트 위기를 이해하기 위한 방정식 풀이 (2)

변수(變數) – ‘어떻게 할 것인가’, 민중의 선택

이렇듯 무르시 정권과 무슬림 형제단은 짧은 집권 기간 동안 너무나 많은 잘못과 판단 착오를 저질렀다. 물론 그 누가 정권을 잡든 간에 오늘날의 이집트가 직면한 그 수많은 난제를 불과 1년 만에 모조리 해결해주기를 기대한 사람들은 없었다. 그러나 적어도 무르시 정권은 아랍의 봄의 성과를 물거품으로 만들려는 반혁명 세력들의 끊임없는 시도와 책략의 본질을 대중들에게 솔직히 밝히고 그들과 맞서 싸우기 위한 개혁의 청사진을 제시함으로써 과거 반 무바라크 독재 전선에 함께 했던 다양한 세력을 자기편으로 묶었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과 정치적 입장, 종교, 이념이 다른 사람들을 철저히 소외시키고 힘으로 윽박질렀다. 그런 슬픈 현실을 목격한 시민들의 실망감과 분노의 깊이는, 무르시 대통령이 쿠데타로 쫓겨난 다음 날 한 인권활동가가 트위터에 남겼다는 짧은 글이 잘 설명해준다. “이런 일이 일어나서 슬프고 미래가 걱정스럽긴 하지만, 형제단이 우리에게 한 그 모든 일을 생각하면 그들이 쫓겨나고 창피당하는 걸 봐서 너무 행복하다.”7)

그래서 2천 2백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무르시의 퇴진과 조기 대선을 요구하는 서명 용지에 자신의 이름을 적었고, 6월 30일에는 수백만 명의 시민들이 곳곳의 거리로 쏟아져 나와 ‘무르시와 형제단은 물러가라’고 외쳤다. 그리고 7월 3일, 군 최고 사령관이자 국방장관인 압델 파타 엘 시시 장군이 이끄는 군부는 “국민의 뜻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무르시 대통령과 내각의 권한을 즉각 중지시키고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 주요 인사들을 구금하는 동시에 형제단의 지도부에 대한 체포 명령을 내렸다. 또한 한시적인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대법원장을 임시 대통령으로 하는 과도 정부 설치를 발표했다.

이집트 시민들뿐만 아니라 그를 지켜보는 전 세계 시민들의 여론까지 둘로 갈라지게 만든 것은 바로 이 대목에서 출발한다. 즉, ‘정부가 많은 시민들의 열망과는 정반대의 길로 가고 있다, 그래서 분노한 시민들이 정부의 퇴진을 요구했다, 그런 요구에 따라 군부가 정권을 끌어내렸다’고 했을 때 이건 쿠데타일까, 아니면 또 다른 혁명일까 하는 것이다. 혹은, 쿠데타는 쿠데타라 하더라도 시민들의 폭발적인 반정부시위에서 비롯된 것이니만큼 이건 ‘민중의 쿠데타(inqilab ash-sha’bi)’라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여기에 관해서 무르시 대통령의 복귀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입장은 단호하다. 백번 양보해서 아무리 실정을 저질렀다고 하더라도 시민들이 공정하고 자유로운(여기에 대해서도 이론의 여지는 많지만) 투표를 통해 뽑은 대통령을 군이 무력을 동원해 강제로 끌어내린 건 어디까지나 불법적인 쿠데타일 뿐이라는 것이다. 반면 무르시의 축출에 찬성하는 사람들은, 갈수록 독재의 길로 치닫는 정부를 주권자인 시민들이 반대해서 몰아낸 것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민주주의 회복이라고 반박했다. 선거는 민주주의의 형식 중 하나 일뿐인데 그걸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는 것은 ‘밸로토크라시(ballotocracy)’8)라고 잘라 말한다.

이에 대한 명확한 답을 내릴 수 있는 공식은 딱히 없다. 둘 중 어느 한 쪽이 절대적으로 옳고 틀린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난 두 달 간 군부가 저지른 폭력과 인권침해가 무르시 정권 시절의 수준을 한참 뛰어넘은 상황에서는 그런 논쟁 자체가 크게 의미 없게 돼 버렸다. 직접적인 학살과 국가 폭력의 희생양이 된 무르시 지지자들뿐 아니라 무르시의 하야를 주장하며 거리와 광장을 점거하고 군부의 개입을 암묵적으로 지지했던 자유주의자들과 좌파, 시민사회진영까지도 쿠데타 주도 세력들에 의해 자신들의 뜻이 완전히 왜곡당하고 주변부로 내몰리는 피해자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무르시 하야를 주장하는 국민 서명을 주도하고 6월 30일 대규모 반 무르시 반 형제단 시위의 기폭제 역할을 한 것은 ‘타마루드(반란)’라는 연합조직이었다. 올해 스물여덟의 마흐무드 바드르를 비롯한 다섯 명의 청년들이 제안해서 결성된 이 조직은 올 4월, 아주 느슨한 연대체로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모하메드 엘바라데이9)가 이끄는 헌법당과 함딘 사바히10)의 이집트 대중경향당, 사회민주당, 사회주의 동맹당, 이집트 공산당, 혁명적 사회주의자들(RS)에 이르기까지 자유주의와 세속민족주의, 좌파진보세력이 대거 망라된 ‘민족구국전선(NSF)’과 2011년 무바라크 축출 시위를 주도했던 ‘4월 6일 청년운동’, 대선 당시 좌파와 청년그룹의 지지를 받았던 압델 모나임 아불 포토우 전 대선후보의 ‘강한 이집트당’ 같은 주요 정치사회세력과 인물들의 지지를 얻으면서 그들은 급격히 영향력을 키워갔다. 거기에 이집트독립노조총연맹(EFITU) 같은 진보적 노동운동조직과 대부분의 인권단체들도 그들의 무르시 하야 주장에 힘을 보탰을 뿐 아니라 군부의 개입 역시도 어쩔 수 없이 필요한 수순이라 여기며 사실상 그들의 행동을 용인했다.

그런데 문제는 ‘타마루드’ 내부와 지지 세력들 가운데엔 과거 무바라크 독재정권의 인물들과 경제 엘리트들도 대거 포함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무바라크 정권 아래서 외무장관을 지내고 아랍연맹 사무총장까지 역임했던 암르 무사와 ‘타마루드’ 운동에 많은 돈을 후원한 억만장자 나기브 사위리스가 대표적이었다. 이 대목에서 잠깐 한 번 생각해보자. 민중의 힘으로 무바라크를 타도했던 혁명의 정신을 무르시 정부와 형제단이 배신했기 때문에 무바라크 잔당들과 손을 잡고 그들을 몰아낸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모순이다. 물론 그럼에도 (자유주의자들까지는 모르겠지만) 좌파와 진보세력이 그 대열에 합류해 박수를 보낸 데는 나름의 이유가 없지 않았다. 이집트의 좌파와 진보세력은 원래부터 무슬림 형제단을 믿지 않았다. 아니 혁명의 적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앞서 설명한 것과 같이 그들의 불신은 현실에서 정확히 사실로 드러났다. 그래서 더 이상 형제단에게 권력을 맡겨 놓았다가는 이슬람주의자들에 의한 또 다른 독재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릴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크게 작동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기득권 세력의 핵심 중의 핵심인 군부를 믿은 것도 절대 아니었다. 다만 2011년에 이어 이번에도 민중들의 직접 행동을 통해 잘못된 정권을 몰아냄으로써 ‘거리 정치의 힘’을 다시 한 번 입증해보이게 되면, 아무리 군부라 할지라도 향후 민중들의 뜻을 무시하거나 마냥 거스르지는 못할 거라는 판단을 한 듯하다.

하지만 이집트 좌파와 진보세력은 너무 안일하고 순진했다. 아니, 그들이 순진했다기보다는 군부와 기득권 세력이 그만큼 치밀하고 잘 준비되어 있었다는 표현이 맞겠다. 쿠데타 직후 엘 시시 장군과 최고군사위원회는 허울 좋은 민간 임시정부를 구성해놓고, 그 중 내무장관 자리에 과거 정치범들에 대한 고문과 인권침해로 악명 높던 무함마드 이브라힘 장군을 앉혔다. 그리고 이브라힘 장관은 임명되자마자 은퇴한 경찰관들과 범죄자들을 끌어 모아 “벨타지”라는 보안 조직을 부활시켰다. 그들은 무르시 지지자들이 시위와 농성을 벌이는 현장이면 어김없이 나타나 시민들을 학살하고 구타했다. 파업 현장에도 투입돼 노동자들에게 테러를 가했다. 거기에 한 술 더 떠 엘 시시 사령관은 7월 26일 텔레비전 연설에서 “우리 군에게 테러와 폭력에 맞설 권한을 위임한다는 의사를 보여주기 위해” 거리로 나와 반 형제단 시위를 벌여줄 것을 시민들에게 요구했다. 무르시 복귀와 형제단 탄압 중단을 요구하는 시민들을 테러리스트로 규정하고, 자신들의 폭력진압을 ‘테러와의 전쟁’이라고 정의내린 것이다. 당연히 인권단체들과 좌파, 진보적인 시민들은 강하게 반발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 ‘타마루드’ 운동은 “(보안군이) 무슬림 형제단이 저지르는 폭력과 테러에 맞서 자기 역할을 다하고 있다는 사실이 기쁘다”고 환영했다. 그들이 말하는 ‘보안군의 자기 역할’은 8월 중순에 그야말로 정점에 달했다. 카이로의 라바아 알-아다위야 사원과 알 나흐다 광장, 람세스 광장, 아부 자아발 교도소 등에서 최소한 천 명이 넘는 시민들을 마구잡이로 학살한 것이다. 그러자 임시정부에 참여했던 모하메드 엘바라데이 부통령과 여러 자유주의 성향 인사들이 항의의 뜻으로 자리를 내던졌다. 그러나 존경받는 노동운동 지도자이자 이집트 독립노조연맹 의장이었던 카말 아부 에이타 같은 인물은 그에 아랑곳 않고 인력 이민부 장관 자리를 꿋꿋이 지키고 있다. 그밖에도 많은 자유주의자들이 군부 편에 남아 있다.

3년 전 함께 거리에서 ‘빵과 자유와 정의’를 외쳤던 사람들은 이렇게 뿔뿔이 갈라지고 흩어졌다. 쫓겨난 대통령이 복귀할 때까지 죽음을 각오하며 싸우겠다고 전의를 불태우는 도시 빈민, 계속 이어지는 학살에 이건 정말 아니라며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청년, 조만간 군의 총칼이 자신들에게도 겨눠질 걸 예감하는 노동자, 군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자며 응원의 박수를 보내는 상인, 이참에 테러리스트를 뿌리 뽑아야 한다고 흥분하는 언론인, 새 임시정부에서 요직을 맡은 진보지식인……. 그런 가운데 장군들과 무바라크 시절 어깨에 힘깨나 줬던 고위 관료들, 정치인, 판검사, 자본가들의 얼굴에는 의기양양한 미소가 번져갔다. 아랍의 봄 이후 2년 4개월 만인 지난 8월 22일 교도소에서 풀려나 가택연금 상태에서 재판을 받게 된 옛 독재자 무바라크의 얼굴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두 번째 상수(常數) – 다시 권력의 전면에 등장한 장군들

이집트 군부, 그 중에도 지도부를 구성하는 장군들은 지금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이집트의 정치에 있어서 상수이다. 2011년 무바라크 축출 이후 과거 정권의 중심부를 차지하던 세력들 가운데 유일하게 별다른 타격을 입지 않은 세력이 그들이었다. 재계와 자본가들은 보름 넘게 나라 전체를 뒤덮은 시위와 노동자들의 파업으로 인해 많은 재정적인 타격을 입었다. 그 이후에도 극도의 경기침체와 재정위기로 인해 손실은 만회되지 않았으며, 독립적인 노동운동과 인권운동이 성장하면서 상대적으로 입김이 약화됐다. 사법부는 사소한 절차적 문제를 들어 의회와 제헌의회의 해산을 명령하는 등 그 영향력을 계속 유지하려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자신들의 권한을 제한하려던 무르시 대통령의 포고령이 시민들의 완강한 저항으로 겨우 철회된 사례에서 보듯이 이제는 권력과 시민 양쪽의 눈치를 모두 봐야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에 비해 군부는 아랍의 봄 당시 무바라크 전 대통령의 무력 진압 명령에도 ‘중립’을 지키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시민들의 분노를 비껴갈 수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 쿠데타를 일으키긴 했지만 사실 군은 무르시 대통령과 형제단의 집권 때문에 손해 본 게 그다지 없었다. 원래 무바라크에서 무르시로 정권이 바뀌면서 장군들이 가장 촉각을 곤두세웠던 부분은 군에 대한 민간의 감시와 견제 여부였다. 이집트 군은 스스로 국가의 질서와 안정을 방어하는 최후의 보루라 자처해왔으며, 따라서 행정부와 의회, 사법부, 시민사회 할 것 없이 그 어떤 외부세력도 손댈 수 없는 ‘국가 위의 국가’처럼 행동해왔다. 일례로, 국방예산의 정확한 금액과 사용처는 물론이거니와 미국 정부가 해마다 보내주는 약 13억 달러 어치의 군사원조도 군의 핵심 수뇌부 말고는 어디에 얼마가 쓰이고 얼마를 남겼는지를 누구도 알지 못한다. 대통령도 모르고 의회도 몰랐다. 뿐만 아니라, 군은 독자적으로 운영해온 기업체들과 각종 부동산과 주식 투자로 해마다 막대한 수익을 거둬들였다. 그렇게 벌어들인 수익과 자산이 이집트 경제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적게는 15퍼센트, 많게는 40퍼센트에 이른다고 하는데 그 역시도 정확한 규모는 아마 장군들도 모를 것이다. 그래서 아랍의 봄 이후 시민들의 주된 개혁 요구 중 하나가 군을 정부의 통제권 아래 두고 국민의 대표인 의회가 감시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무르시 정부는 새로 제정된 헌법에서도 군의 예산과 임무는 주로 군인들로 구성될 국방위원회가 알아서 정하고 집행하도록 했고, “군에게 위해를 가하는 범죄를 제외하고”라는 애매한 문구를 넣어 여전히 민간인을 군사법정에서 재판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

그럼에도 군부가 무르시 정권 제거에 나선 것에 대해 일각에서는 ‘이슬람주의의 확산에 맞서는 세속주의 수호세력’이라는 이집트(와 터키, 알제리 등)에서의 군의 특수한 역할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하지만 전체 인구의 절대 다수가 무슬림인 이집트에서는 역대 군사정부의 대통령들부터 장군들, 장교들, 일반 사병들까지도 대부분 무슬림들이다. 이번에 쿠데타를 주도하면서 이집트 정국의 최대 실세가 된 엘 시시 국방장관 역시도 집 밖에서는 부인에게 항상 이슬람식 복장을 갖추게 할 정도로 독실하고 보수적인 무슬림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이슬람을 믿는 것’과, 이슬람 신앙과 법률이 국가 운영의 기본 원리이자 헌법보다 우위에 있는 절대적 기준이 되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이슬람주의’는 차원이 다르다. 그래서 무르시 대통령과 무슬림 형제단이 갈수록 이슬람주의 색채를 강하게 띠면서 군부와 세속주의 시민들의 경계심과 반발이 커졌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무슬림 형제단이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처럼 극단적인 이슬람주의로까지 치달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집트에서 그리 많지 않았다. 종교적으로는 이슬람을 믿지만 정치, 사회, 문화적으로는 세속주의를 지지하는 시민들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사실을 무시해버릴 만큼 형제단 지도부의 현실감각이 바닥이거나 근본주의적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급진 이슬람주의 성향으로 따지자면 오히려 이번에 군부의 편에서 쿠데타를 지지한 알 누르당을 먼저 제거했어야 맞다. 그들은 수니파 이슬람 중에서도 가장 근본주의적인 입장을 표방해온 살라피 무슬림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군부가 이번에 무르시 정권 축출과 무슬림 형제단 무력화 카드를 끄집어내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이집트 내에서 군부를 제외하고는 가장 잘 조직되고 확고한 지지층을 가진 무슬림 형제단의 정치경제적 권력이 점점 더 강해지고 굳어지는 걸 사전에 차단해야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60년 전 나세르 전 대통령이 그랬듯이 말이다. 게다가 다행스럽게도(?) 무르시 정권과 형제단은 잇단 실정으로 인해 민심을 잃었다. ‘집권세력에게서 등을 돌린 시민들의 뜻을 이행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군이 나서게 됐다’는 쿠데타의 명분까지 만들어진 셈이다. 그리고 6월 30일부터 시작된 대규모 반정부 시위를 기회로 삼아 목적을 달성했다. 그렇게 군은 1년 만에 다시 정치의 전면에 나서게 되었고, 이집트는 다시 군사독재라는 암흑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비록 안타깝지만 부인할 수 없는 이집트의 현실이다.

세 번째 상수(常數) – 쿠데타를 쿠데타라 부를 수 없는 미국과 지역 국가들

미국을 비롯한 서구 강대국들과 주변지역의 다른 국가들 역시도 이집트 위기에 있어서 상수에 속한다. 지역의 정치 지형이 정말 엄청난 지각변동을 일으키지 않는 한 각 나라들의 입장과 태도는 좀처럼 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7월 3일 쿠데타로 이집트의 무르시 정권이 무너진 직후부터 미국과 유럽연합 정부들은 안팎으로 많은 여론의 압력을 받았다. 이집트에서 일어난 정치적 변화를 쿠데타로 공식 인정하라는 압력이었다. 특히 미국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1979년 이래로 이집트 군부에게 모두 660억 달러에 달하는 군사원조를 해왔다. 이집트가 지금까지 미국에게서 건네받은 무기만 해도 전투기가 221대, 탱크가 약 천여 대에 달하는 등, 이집트는 이스라엘 다음가는 미국의 원조 수혜국이었다. 미국과 이집트 군부 사이의 밀월 관계는 해마다 약 5백 명의 이집트 군 장교들을 펜실베이니아의 육군대학 등으로 불러들여 훈련과 교육을 제공하는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 덕분에 이집트 군대는 철저히 미국화되었고 미국과의 동맹관계에 완전히 중독되어 버렸다.

사실 미국 정부로서는 무르시 대통령과 무슬림 형제단이 통치하는 이집트가 생각보다 그리 썩 나쁘지는 않았다. 아랍의 봄 항쟁으로 독재자 무바라크가 쫓겨날 당시 미국의 정책입안자들이 가장 우려했던 것은 불확실성이었다. 그들은 중동이든 중남미든 아시아든 간에 지역의 한 국가에서 정권이나 체제가 바뀔 때마다 그걸 인정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정하는 기준으로 삼는 것은 예측가능성이었다. 일차적으로는 자신들의 지역 패권과 이익을 보장해주는 정권이 들어서면 가장 좋고, 그게 아니더라도 어느 선에서 자신들이 예측하고 제어할 수 있는 정권이면 용인해주는 식이었다. 거기에 있어서 그 정권이 독재냐 민주적이냐, 군인이냐 민간인이냐 하는 것은 중요한 기준이 아니었다. 그들은 그걸 가리켜 ‘지역 안정’이라고 부른다.

이집트의 무슬림 형제단 정권은 미국이 원하는 그런 안정을 전혀 깨뜨리지 않았다. 그들은 미국 정부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또 이집트에게 막대한 원조를 안겨주게 된 계기가 된 이스라엘과 이집트 정부 간의 1979년 평화협정을 그대로 ‘존중’했다. 경제적으로도 신자유주의 개방정책에 대한 지지를 분명히 했고, IMF와 세계은행의 처방도 충실히 따랐다. 굳이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무르시 정권을 갈아치울 필요까지는 없었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이번에 이집트 군부가 정권을 뒤엎고 스스로 권력을 잡겠다고 나섰다. 그렇다고 해서 뼛속까지 친미인 이집트 군부에 굳이 등을 돌리면서까지 그들을 강하게 야단칠 필요가 있을까? 미국 정부 입장에서는 당연히 그럴 필요가 없다. 오바마 대통령이 끝까지 이집트의 정치적 격변을 가리켜 ‘쿠데타’라 부르길 거부하고, 존 케리 국무장관이 거기에 한술 더 떠 “민주주의의 회복”이라고 칭송한 건 그런 이유에서였다.

미국의 육군대학에서 미국의 정치 외교 메커니즘을 꼼꼼히 배워간 이집트의 엘 시시와 장군들은 그런 속사정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 그리고 그밖에도 그들이 믿는 구석이 또 있었다. 바로 이집트-사우디아라비아-이스라엘로 이어지는 지역의 친미국가 연결축의 나머지 두 나라였다. 예상대로 이스라엘은 미국 내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로비단체인 <미국 이스라엘 공공정책위원회(AIPAC)>를 통해서 이집트에 대한 원조를 중단시키려던 미 상원의 표결이 86표 대 13표로 부결되도록 압력을 행사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 쿠웨이트, 바레인은 쿠데타 이틀 뒤 120억 달러라는 어마어마한 자금을 새로 들어설 정부에게 지원하겠다고 발표했다. 아랍의 봄의 영향이 자국 내의 대대적인 민주화 요구로까지 확산될까봐 전전긍긍해왔던 왕정독재국가들로, 그들은 이집트 군부의 권력 장악이 결국은 아랍의 봄의 불씨를 완전히 꺼뜨리는데 도움이 될 거라 믿는 것이다.

그에 반해 무슬림 형제단이 기댈 곳은 없다. 이란-시리아-헤즈볼라로 이어지는 이른바 지역의 반미 주축들은 수니파인 무슬림 형제단과는 달리 시아파 무슬림들이었다. 게다가 형제단의 무르시 대통령은 집권하는 동안 시리아의 바샤르 알 아사드 대통령의 축출을 공개적으로 지지하면서 그들의 미움을 샀다. 그나마 이슬람주의자들로 구성된 정의개발당이 집권해온 터키와 카타르, 이번 사태로 이집트의 회원국 자격을 정지시킨 아프리카 연맹 정도가 쿠데타를 비난하고 무르시 복귀를 요구하고 있지만, 대세에 영향을 줄만한 카드와 지렛대는 없다. 즉 현재의 이집트 사태에 이를 때까지 국제사회의 입장과 태도는 원래부터 고정된 상수였으며 앞으로도 변화할 가능성은 별로 없다.

전망 – 결국 이집트의 미래를 결정지을 수 있는 유일한 변수는 민중들뿐이다

여기까지 정리하고 되돌아보니, 이집트의 현 위기라는 방정식에 있어서 결과를 달라지게 할 수 있었던 유일한 변수는 이집트 시민들이었다. 만약 무르시 정권과 무슬림 형제단을 비판하며 거리로 나섰던 시민들이 군부의 쿠데타 움직임에 대해서도 단호히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더라면 사태는 어떻게 전개됐을까. 모르긴 해도 지금처럼 군부가 이렇게 수월하게 과거 독재 시대 인물들과 체제를 다시 부활시켜 새로운 독재 체제를 갖추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무슬림 형제단의 지지자들만 고립돼서 저항하다 학살당하고 쫓겨 다니는 현재의 국면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미래도 마찬가지이다. 지금 이집트 시민들 중에서는 무슬림 형제단을 잔인하게 학살하고 탄압하는 군부의 행동을 지지하거나 불가피하다고 여기는 이들이 그렇지 않은 이들보다 더 많은 게 사실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군대의 탱크와 총칼로는 결코 빵과 자유와 정의를 가져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질 것이다. 2011년과 2013년 두 번에 걸쳐 민중들을 거리로 이끌어낸 이집트의 청년, 노동자, 여성, 인권활동가, 좌파, 시민사회진영은 지금부터 다시 전열을 추스르고 그 때를 대비해야 한다. 그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이집트의 미래라는 방정식의 답은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7) http://www.aljazeera.com/indepth/opinion/2013/08/20138128533439421.html
8) 투표를 뜻하는 ‘ballot’과 민주주의(democracy)를 합성한 조어
9)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전 사무총장이자 노벨 평화상 수상자. 이집트 자유주의 세력을 대표한다.
10) 이집트가 미국과 이스라엘을 상대로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민족주의자. 2012년 5월 대선 1차 투표에서 20.7%의 득표율로 3위를 차지했다.

최재훈 | 경계를넘어
* 이 글은 계간 <진보평론> http://jbreview.jinbo.net 2013년 가을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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