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를 넘는 뉴스 2

Published on 3월 3rd, 2015 | by 경계를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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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바니 전투, 민주주의와 평등을 위한 싸움

중동은 과연 민주주의를 받아들일 수 있는가? 무슬림들은 인권과 평등, 다원주의의 가치를 수용해 타 종교를 믿는 사람들과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을까? 아, 행여나 오해는 마시길. “그들은 우리가 가진 민주주의와 자유를 증오하기 때문에 우리를 미워한다”던 조지 W. 부시 류의 헛소리나 “이슬람은 서구를 향해 자신을 아이 취급하고 예외로 다루어 달라고 더는 징징거리지 말아야 한다”던 소설가 장정일(2015년 2월 5일자 한겨레신문)식의 편견과 무지에 찬 냉소를 되풀이할 의도로 꺼낸 말은 아니니까 말이다.

사실 앞서 제기한 질문은 그 누구보다도 지역의 민주주의와 평화, 이슬람의 개혁을 바라는 중동 사람들이 스스로에게 종종 던지곤 하는 물음들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그들의 결론은 ‘그렇다’로 끝을 맺는다. 서구 열강들이 정치적 패권과 경제적 이익을 위해 부당한 선동과 개입, 침략을 일삼지만 않는다면, 중동도 얼마든지 민주주의와 평화공존을 선택할 의지와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들을 가장 답답하게 하는 부분 중 하나는, 그런 사실을 실제로 세계인들에게 증명해보일 모델이 없다는 점이다. 가장 최근에 이뤄진 시도로는 흔히 ‘아랍의 봄’이라 일컬어지는 중동과 북아프리카의 민중항쟁이 있긴 했지만, 다들 알다시피 나토군의 리비아 군사개입을 기점으로 해서 계절은 자연의 섭리를 거슬러 다시 겨울로 되돌아간 느낌이기에 그들의 당혹감은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 중동의 한복판에 위치해있지만 그동안 우리가 눈길 한 번 제대로 주지 않던 지역에서 초보적이나마 의미 있는 민주주의 실험이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비교적 최근에서야 알게 됐다. 작년 가을부터 이슬람국가(이하 IS)라는 ‘이슬람인 듯 이슬람 아닌’ 잔인무도한 무장 세력의 집중공격을 받아 거의 함락 직전까지 몰렸다가 기사회생해, 2015년 1월의 마지막 날에 기어코 IS로부터 패배 선언을 받아내고야 만 시리아 북부의 코바니와 인근 자치지역(‘로자바’)이 바로 그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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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르드의 질곡과 정치 결사체의 형성

본격적인 이야기를 위해서는 먼저 쿠르드 민족에 대해 짚고 넘어가는 데서부터 출발해야겠다. 로자바의 정식 명칭이 로자바 쿠르드스탄, 즉 ‘서 쿠르드스탄’인데서 알 수 있듯이 지역 주민들의 절대 다수가 쿠르드 인들인데다, 근래의 이른바 ‘로자바 혁명’을 말할 때 쿠르드 인들이 걸어온 길을 더듬어보지 않고서는 설명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익히 알려진 바대로, 전체 인구가 약 3천 5백만 명에서 4천만 명으로 추산되는 쿠르드 인들은 ‘스스로의 국가를 가지지 못한 최대의 민족’이라 일컬어진다. 그래서 16세기부터 오스만 튀르크 제국의 지배를 받아온 쿠르드 인들의 가장 절실한 염원은 쿠르드 독립국가의 건설이었고, 1차 세계대전 당시 그들이 연합국의 편에서 오스만 튀르크에 맞서 싸운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는 1923년 로잔 조약을 통해 쿠르드 인들의 기대를 무참히 짓밟아 버렸다. 신생 터키 공화국의 쿠르드 지배를 인정해준 것이다. 그 결과 쿠르드 인들은 터키(1천 8백만), 이란(7백만), 이라크(5백만), 시리아(2백 5십만) 등지에 뿔뿔이 흩어져 살게 됐다.

그렇게 각자가 속한 국가는 달랐지만, 그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터키에서는 터키 인들로부터, 이란에서는 페르시아 인들, 이라크와 시리아에서는 아랍인들로부터 갖은 억압과 박해, 차별을 받고 살아가야 했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억압이 심했던 곳은 터키였다. 현대 터키 공화국을 창설한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시절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터키 정부는 공식적으로 ‘터키는 터키인들의 단일국가일 뿐, 쿠르드 민족이란 존재조차 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고수할 만큼 (터키 인구의 20퍼센트를 차지하는) 쿠르드 인들을 철저히 유령 취급했다. 1991년까지는 쿠르드어로 말하는 것도 불법이었고, 쿠르드 이름을 가지는 게 합법화된 건 불과 10여 년 전인 2003년의 일이었으며, 2013년까지는 쿠르드 문자 사용도 금지돼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싸우고 저항했다. 이란에서는 샤 왕조의 봉건독재와 뒤이은 이슬람 신정세력에 맞서 기나긴 무장 투쟁을 벌였고, 이라크와 시리아에서도 아랍 사회주의를 내세운 바트당 집권세력과 싸웠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쿠르드인들의 저항 투쟁을 이끄는 정치적 결사체들이 생겨나기 시작한 건 당연지사였다. 마수드 바르자니가 이끄는 전통주의 보수정당인 이라크의 쿠르드 민주당(KDP)과 잘랄 탈라바니(2005년부터 2014년 7월까지 이라크 대통령을 지냈다)가 1975년 쿠르드 민주당에서 떨어져 나와 창설한 사회민주주의 계열의 이라크 쿠르드 애국동맹(PUK), 압둘라 외잘란을 중심으로 한 좌파 활동가들이 1978년에 결성한 터키의 쿠르드 노동자당(PKK) 등이 가장 대표적이었다. 그들 가운데 이라크 내 쿠르드 정치 세력의 입지는 1990년을 기점으로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된다. 사담 후세인의 쿠웨이트 침공을 계기로 발발한 1차 걸프전에서 미국 정부에 적극 협력한 덕분에 지역 내 미국의 동맹 세력 중 하나로 부상하게 된 것이다. 그 때부터 미국은 2차 걸프전으로 사담 후세인을 완전히 제거하기 전까지 이라크 북부의 쿠르드인 거주 지역에 비행금지구역을 설정해 쿠르드 인들을 ‘보호’해주었고, 현재는 이라크 중앙정부의 영향력으로부터 거의 자유로운 쿠르드 자치정부(KRG)가 설립돼 사실상 ‘국가 안의 국가’로서 기능하며 친 서구, 친 자본 정책 기조에 따른 개발 모델을 추진 중에 있다.

반면 마르크스-레닌주의 강령에 기초한 사회주의 독립국가 건설을 목표로 한 터키의 쿠르드 노동자당은 혹독한 시련의 시절을 보내야 했다. 특히 우익 군부 쿠데타가 일어난 직후인 1980년부터 그 강도가 극에 달한 터키 정부의 탄압을 피해 지도부와 상당수 활동가들은 다른 좌파 세력들과 함께 인근 레바논으로 거점을 옮길 수밖에 없었고, 그 곳에서 팔레스타인인민해방전선(PFLP) 전사들과 나란히 이스라엘 군의 침략에 맞서 싸웠다. 그리고 1984년, 쿠르드 노동자당은 터키에서 본격적인 무장 항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2013년 3월 휴전이 이뤄지기까지 무려 30년 가까이 지속된 무장 투쟁은 최소 3만 5천 명에서 4만 명에 이르는 쿠르드 인들이 목숨을 잃는 결과를 낳았고, 수백 만 명이 정부군의 공격을 피해 고향을 등져야 했다. 그 과정에서 터키 군과 정보기관이 저지른 숱한 만행에 대해서는 따로 설명하지 않겠다. 다만 한 가지 짚어야 할 점은, 쿠르드 노동자당 역시도 일방적인 피해자라고 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잘못과 인권침해를 저질렀다는 사실이다. 특히 압둘라 외잘란을 정점으로 철저히 수직화 된 권위적이고 강압적인 스탈린주의 식 의사결정 구조와 다른 경쟁 조직들에 대한 공격은 세계 좌파 진영조차도 그들에게서 등을 돌리게 하는 결과로 이어졌고, 정부에 협력한 것으로 의심되는 주민들을 상대로 한 가차 없는 처벌은 수시로 국제인권단체들의 비난의 도마에 올랐다.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 민주적 연방제로

하지만 언제나 변화의 계기는 위기로부터 찾아오는 법이었다. 1999년 2월 15일, 케냐의 나이로비에서 미 중앙정보국의 도움을 받은 터키 정보요원들이 압둘라 외잘란을 체포하는 일대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그 직후 세계 각지의 쿠르드 인들이 들고 일어나 그의 석방을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였음에도 불구하고, 외잘란은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고(이후 터키가 유럽연합 가입을 위해 사형제를 폐지함으로써 종신형으로 감형되었다) 마르마라 해의 어느 작은 섬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또한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 무렵 쿠르드 노동자당이 모델로 삼던 소련과 동구 사회주의권이 차례로 와르르 무너지고 있었다. 감옥에 수감된 외잘란과 핵심 활동가들은 당연히 심각한 고민에 휩싸이지 않을 수 없었다. 당의 미래에 대해, 아니 쿠르드 해방 투쟁과 민족 전체의 나아갈 방향에 대해서 말이다. 치열한 토론과 자기반성의 시간을 거쳐 그들이 내놓은 답은 독립국가 건설의 요구를 포기하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리 발버둥 쳐봐도 안 되니까 이쯤에서 접자’는 자포자기의 심정에서 나온 결론은 아니었다. 그들은 민족국가라는 형태는 필연적으로 소수에 의한 다수의 지배와 권위주의로 이어질 뿐, 진정한 민주주의와 자유를 보장하지 못한다는 결론에 이른 것이다. 특히 쿠르드 민족뿐만 아니라 비록 소수일망정 아랍인과 아시리아, 아르메니아, 투르크멘, 체첸 등 다양한 인종이 함께 뒤섞여 살아가고, 종교 역시도 이슬람과 기독교, 야지드, 무신론자 등으로 다양한 쿠르드 땅에서 하나의 민족, 하나의 종교, 하나의 언어에 기초한 국가는 필연적으로 배제와 억압을 낳는다는 것이 그들의 관점이었다.

그 대신 그들이 내놓은 대안은 종교와 인종에 관계없이 모두가 참여하는 상향식 민주주의와 양성 평등, 생태주의, 협동조합에 기초한 사회적 경제를 골자로 한 ‘민주적 연방제’였다. 그리고 그런 원칙들을 이행하기 위해서는 권력이 집중되기 쉬운 중앙정부를 아예 따로 두지 않고, 마을, 도시, 지역 단위로 주민들이 스스로 조직하고 스스로 운영하는 ‘민주적 자치’를 실시하겠다는 것이었다. 직접 자신의 글에서 밝혔듯이 멕시코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의 경험과 북미 사회학자이자 아나키스트인 머레이 북친의 사회적 생태론에서 영감을 끌어온 외잘란의 민주적 연방제와 자치 구상은, 그러나 최근 몇 년 전까지는 거의 아무런 이목도 끌지 못했다. 구체적으로 실현에 옮길만한 토대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온갖 그럴듯한 좋은 이야기만 다 끌어와서 묶어놓은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나 변화의 계기는 위기로부터 찾아왔다. 이란과 이라크, 시리아의 쿠르드 노동자당 지지자들은 각자의 나라에 자매 정당을 꾸렸는데, 시리아의 경우는 2003년 북부 로자바 지역을 중심으로 창설된 민주연합당(PYD)이 그들이었다. 터키와 마찬가지로 시리아 내 쿠르드인들 역시도 단일 아랍국가로서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바트당 정권 아래서 자신들의 민족 정체성과 언어, 문화를 전혀 보장받지 못했는데, 특히 정부가 출생신고를 받아주지 않아서 무국적 상태로 살아가는 주민들의 수가 수십만 명에 달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 중 하나였다. 그들은 학교에 입학할 수도 없고, 그래서 변변한 직업을 구할 수도 없었으며, 혼인신고도 하지 못해 자녀들 또한 그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는 악순환이 되풀이되어온 것이다. 그런 가운데 2011년 시리아에서도 민주화 항쟁이 시작됐다. 항쟁은 곧 내전으로 옮겨갔고, 시리아의 쿠르드 인들도 선택의 기로에 서야 했다. 쿠르드 인들을 친정부 세력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무국적 쿠르드 인들에게 국적을 부여해주겠다는 유화책을 내놓은 아사드 정부의 편에 설 것이냐, 아니면 반군의 편에 서서 정부군에 맞서 싸울 것이냐 하는 선택이었다. 물론 정부 편에 서자는 의견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적극적으로 반군의 편에 설 수도 없었다(초기에는 자유시리아군과 함께 반정부 전투에 가담하기도 했었지만). 워낙 다양한 세력들로 구성된 반군들 중에는 극단적인 이슬람주의자들도 섞여 있었고(쿠르드인은 99퍼센트가 이슬람 수니파이지만 세속주의 성향이 강하다), 시리아의 아랍 정체성을 지키는 것이 민주화보다 더 중요하다고 여기는 강경 아랍민족주의 세력들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로자바의 실험들

그래서 그들이 선택한 것은 ‘제3의 길’이었다. 바로 외잘란과 쿠르드 노동자당이 주창해온 민주적 연방제에 기초한 자치 모델을 직접 현실로 구현하기로 한 것이다. 때마침 반군들의 공세로 인해 수세에 몰린 시리아 정부군이 수도 다마스쿠스와 알레포에 전력을 집중하기 위해 2012년 7월 19일 로자바 지역에서 전면적으로 철수했다. 주민들은 남아있던 정부 공무원들에게도 아무런 보복을 가하지 않고 떠나는 걸 허락해주었다. 그리고 그 즉시 마을 단위로 만민 공동회 방식의 주민 회의와 자치 위원회들이 꾸려지기 시작했다. 거기엔 주민 누구나 참여해서 마을과 지역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문제들에 대해 자유로이 토론할 수 있고, 그들 가운데 선출된 대표들은 도시와 주(canton) 단위의 의회를 구성해 지역의 현안을 논의하고 결정한다고 한다. 솔직히 여기까지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여타 나라들의 지방자치제와 모양새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다만 로자바의 경우는 상향식 민주주의의 종착점이 결국 중앙정부로 대표되는 국가로 귀결되는 것을 거부한다는 데 그 차이가 있다. 즉 지역 전체적으로 자치를 관할하는 ‘민주사회를 위한 운동(TEV-DEM)’이란 정치연합 조직은 큰 틀에서의 계획을 수립하고 조정하는 역할을 할 뿐 주민 자치 조직의 의사결정에는 일절 간섭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갖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로자바 지역을 구성하는 세 개의 주(아프린, 코바니, 자지라)에는 각각의 의회와 행정부, 선거위원회, 헌법위원회, 지방의회를 별도로 갖고 있다. 물론 그런 자치와 참여민주주의 원칙이 앞으로 실제 현실에서 얼마나 잘 지켜질 지는 시간을 두고 지켜볼 일이다. 다만 오랫동안 중앙권력의 독재와 권위주의에 짓눌려온 중동 지역에서 그와 같은 실험이 첫발을 뗐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대단히 고무적이라 여겨지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로자바 지역의 실험이 흥미로운 또 다른 이유로는 그 포용성과 양성 평등을 들 수 있겠다. 예를 들어, 각 자치 당국의 최고 책임자는 반드시 이슬람을 믿는 쿠르드인과 아랍인, 그리고 기독교를 믿는 아르메니아나 아시리아인 같이 인종과 종교를 두루 아우른 세 명으로 구성되어야 하고, 그 셋 중 한 명은 반드시 여성이어야 한다. 또한 마을과 도시, 지역 정부의 의사결정 기구에는 여성들이 최소한 40퍼센트 이상을 차지해야 하며, 협동조합이나 모든 공적 부문에서는 독립적인 여성 조직을 따로 두어야 한다. 거기엔 군대도 예외가 될 수 없으며, 쿠르드인민방위대(YPG) 내에 여성들로 구성된 여성방위대(YPJ)가 별도로 구성돼 있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이왕 군대 이야기가 나왔으니 하나만 덧붙이자면, 군인이나 경찰이 되기 위해서는 군사 훈련을 받기 전에 반드시 비폭력 갈등 해결과 페미니스트 교육을 받아야 비로소 총을 만질 수 있다는 이야기도 참으로 신선하게 여겨지는 대목이다.

이 밖에도 생태나 협동조합 등등 여러 다양한 대안적 실험들이 시도되고 있다고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사실 하나는 일부 성미 급한 사람들이 이야기하듯이 시리아 로자바 지역에서 진행되고 있는 변화를 선뜻 ‘혁명’이라고 부르기에는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이 아직 너무나 짧았다는 점이다. 로자바의 구상을 담은 로드맵이라 할 헌법(로자바 사람들은 국가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는 이유로 헌법이란 표현 자체를 거부하고, 그 대신 ‘사회 계약’이란 표현을 쓴다고 한다)이 의회에서 통과되고, 그를 토대로 세 개의 자치 주(canton)가 공식적으로 선포된 게 불과 일 년 전인 2014년 1월의 일이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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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의 맹공과 패배

게다가 다들 알다시피 그 여덟 달 뒤인 2014년 9월부터는 IS가 세 개의 주 가운데 중심 역할을 하는 코바니를 상대로 맹공을 퍼부어대기 시작했다. 이 대목에서 IS가 수천 명의 사상자를 내면서까지 왜 굳이 그렇게 코바니에 집착했는지에 대해 궁금해 하는 분들이 종종 있던데, 애초 IS 지도부는 코바니 주민들의 저항이 그토록 완강할 거라고는 전혀 예상 못했을 거라는 데 한 표를 던지고 싶다. 그저 코바니를 장악하면 터키와 시리아를 잇는 보급로와 흔히 ‘지하드 고속도로’라 불리는 신입 대원 충원 루트를 확보할 수 있다는 계산만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거기엔 작년 초부터 이라크군과 시리아군, 이라크 쿠르드자치지역의 페슈메르가 민병대를 상대로 파죽지세의 승리를 거두면서 얻은 지나친 자신감도 부분적으로 작용했을 것이고, 쿠르드 민병대를 너무 얕봤던 탓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쿠르드 YPG와 YPJ 민병대들의 저항은 완강했고, 시간이 흐를수록 코바니 전투는 IS에게 명분과 사활을 건 전쟁이 되어 버렸다. 왜냐하면 그동안 잠재적 가담 희망자들에게 꽤 먹혀 들어갔던 IS의 프로파간다 중 하나가 ‘신이 우리를 선택했기에, 우리는 결코 패배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는데, 고작 AK-47 소총과 로켓추진 수류탄으로 저항하는 여성 민병대원들에게 밀려 등을 돌리고 달아날 수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IS는 적에게 위치를 노출하지 않는다는 그간의 전술을 깨고 이라크에서 포획한 탱크와 대포들까지 동원해 코바니에 총공세를 가했던 것이며, 그 결과는 참담한 패배였다. 아마도 IS는 이미지 면에서 보나 전력 손실 면에서 보나 당분간 코바니 패배의 후유증을 극복하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 보면, IS에게 코바니는 충분히 승산을 걸어볼만한 싸움이었다. 그건 바로 코바니가 터키의 국경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짐작과는 달리 시리아 아사드 정권과의 사이도 그다지 나쁘지 않았고 양국 간의 교역도 활발했던 터키의 정의개발당(AKP) 정권은 애초 시리아 내전이 시작될 당시에는 중재자 역할을 자처한 바 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터키 정부는 아사드 대통령도 리비아 카다피의 전철을 밟게 될 거라 예상하면서 반군 측에 베팅을 하기 시작했다. 사우디아라비아, 카타르와 더불어, 반군 가운데서도 가장 조직적이고 전투력이 있는 이슬람주의 세력에게 자금과 무기, 병참을 지원하는 역할을 담당한 것이다. 그리고 IS가 지역의 대표적인 이슬람주의 무장 세력으로 급부상한 뒤에도 터키의 태도는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미국과 동맹국들이 2014년 8월 8일 이라크 내 IS를 상대로 공습을 시작한 뒤에도 터키 정부는 아사드 정부를 반드시 축출하겠다는 확답이 있어야 미국의 공습을 지원하겠다며 한 발 물러서 있었던 게 대표적인 증거다. 그 바람에 지금도 미 공군기들은 IS 대원들을 공격할 때 가까운 터키의 인시를리크 공군기지 대신에 멀리 떨어진 걸프만에서 출격을 해야 한다.

바로 그런 터키 정부가 있기에 IS는 코바니에서 자신들의 승리를 확신했던 것이다. 음모론처럼 떠도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터키-시리아 국경 지대에서 취재한 외신 기자들과 현지 주민들의 증언을 종합해 보면 코바니 전투가 한창인 와중에 부상당한 IS 대원들이 터키의 병원으로 후송돼 치료를 받고 터키에서 상당수의 중무기들이 IS 대원들에게 끊임없이 보급되었다는 소문은 거의 사실인 것처럼 보인다.

민주주의보다 패권 우선한 미국과 터키

그렇다면 의문은 또다시 꼬리에 꼬리를 문다. 미국의 주요 동맹국이자 나토의 일원이기도 한 터키는 미군이 IS를 공습하는 동안에도 왜 정치적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그들을 지원했던 걸까? 그 해답의 실마리는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의 말을 통해 쉽게 풀린다. 코바니가 함락 위기에 몰린 상황에서도 사태를 수수방관하는 터키 정부에게 비판의 화살이 쏟아지자, 그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터키 입장에서 볼 때, 쿠르드 노동자당(PKK)이나 IS나 다같은 테러리스트들일 뿐이다.” 즉 터키 정부는 로자바 지역이 민주적 연방제니 민주적 자치니 하면서 자립 모델을 구축하는 것 자체를 쿠르드 노동자당이 지역에서 세력을 확장하는 과정으로 바라보았고, 자국 내 인구의 20퍼센트를 차지하는 쿠르드 인들에게 새로운 가능성과 기대를 불어넣는 위험한 시도로 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에르도안 대통령의 솔직한 속내를 다시 풀어보자면 이렇지 않을까 싶다. ‘터키 입장에서 볼 때, 쿠르드 노동자당(PKK)보다는 차라리 IS가 낫다.’

물론 에르도안 대통령과 정의개발당으로서도 딜레마는 있었다. 터키는 올 6월에 총선을 앞두고 있다. 그간 정치외교 분야에서 에드로안 정부가 가장 큰 치적으로 삼는 것 중 하나는 2013년 3월 쿠르드노동자당과 휴전을 한 것이었다. 그 뒤로도 양측은 완전한 분쟁 종식을 해결하기 위해 평화협상을 진행해오고 있었다. 그런데 코바니 전투에서 IS를 지원하거나, 혹은 최소한 코바니의 함락을 수수방관하는 모습으로 일관한다면 결국 평화협상은 물 건너갈 수밖에 없게 되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그 자체가 지난날에 쌓았던 치적을 한 번에 무너뜨리는 부담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터키 정부는 자국 내 이슬람주의자들에게 구애를 보내고, 터키 민족주의자들의 반 쿠르드 정서를 자극해 표를 얻는 쪽을 택했다. 결국 평화와 공존 대신 증오와 대결을 택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코바니 사태를 둘러싼 미국 정부의 입장에 대해서만 추가로 덧붙이고 글을 맺을까 한다. 사실 오바마 미 행정부는 코바니의 함락과 그로 인해 허리가 끊겨버린 로자바 지역 전체가 IS의 수중에 넘어갈 위험성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듯하다. 어차피 이라크 북서부에서 시리아 동북부 대부분이 이미 IS에게 장악된 상황에서 그 조그만 지역 하나가 추가로 넘어간 게 무슨 대수이겠느냐 하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존 케리 미 국무장관이 여러 차례 코바니의 함락을 “비극적이지만 불가피”하다고 발언한 것이나, 코바니 시내 중심가까지 IS 대원들이 치고 들어와 건물을 사이에 두고 근접전이 벌어지는 상황에서도 계속 공습을 주저했던 게 그 대표적인 증거다. 물론 그 뒤론 미군이 결국 공습을 진행했고, 그것이 실제로 코바니 방어에 도움을 준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미 의회 선거를 코앞에 둔 상황에서 전 세계가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코바니에서 대규모 학살이 벌어지게 될 경우 자신들에게 쏟아질 비난이 더 부담스러웠던 측면이 더 강하다. 그래서 코바니와 로자바 지역에 대한 미국 정부의 시각을 보여주는 보다 상징적인 장면은 작년 8월 초 이라크 북부 신자르 산의 일화가 아닐까 한다. 당초 미국 정부는 8월 8일 3년 만에 이라크 공습을 재개하기에 앞서 IS에 의한 대량학살을 피해 신자르 산으로 피신한 수천 명의 야지드 소수민족 주민들을 구하기 위한 인도주의적 차원의 군사작전이라는 명분을 내세운 바 있다. 그래서 8월 초에 현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미 특수부대원들을 헬기에 실어 직접 신자르 산으로 파견했다. 그러나 그 곳에서 그들을 반긴 사람들은 야지드 주민들을 구하기 위해 IS의 포위망을 뚫고 달려온 로자바 지역 YPG 대원들과 쿠르드 노동자당 민병대원들이었다. 그러자 화들짝 놀란 미 특수부대원들은 그 즉시 헬기에 올라 부대로 복귀했다고 한다. 쿠르드 노동자당은 터키 정부와 미국, 유럽연합이 모두 테러조직으로 규정한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이 일화에서 보듯이 미국 정부는 야지드족이나 코바니 주민들의 운명과 생명이 최우선 관심사가 아니다. 로자바 사람들이 아무리 미국이 그토록 이야기하던 민주주의와 자유, 인권을 향해 나아갈 의지를 보인다 하더라도 그건 중요치 않다. 지역 내 미국의 핵심 동맹국인 터키와의 관계에 금이 가지 않도록 하는 것, 그래서 자국의 지역 영향력과 패권 구도를 흐트러뜨리지 않는 것이 더 우선인 것이다. 중동 지역에서 민주주의가 힘든 이유 중 하나는 바로 거기에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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