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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shed on 4월 15th, 2016 | by 경계를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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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의 봄 5년-지금은 기나긴 변혁의 터널 입구를 지나고 있을 뿐

최재훈(경계를넘어 회원)

2016년 새해를 맞아 전 세계 시민들이 들뜬 마음을 아직 채 가라앉히기도 전인 지난 1월 중순의 어느 날, 튀니지 중부 지방에 위치한 카세린 시에 살던 청년 리다 야히야위는 고압 전류가 흐르는 전신주에 힘겹게 오르고 있었다. 올해 나이 28살, 대학을 졸업한 뒤로도 제대로 된 직장을 잡지 못하던 그는 얼마 전 정부에서 약속한 일자리 명단에 자신의 이름이 빠져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자 낙담한 나머지 스스로 감전사하는 쪽을 택한 것이다. 그의 자살 소식은 즉시 도시와 나라 전체로 퍼져 나갔다. 거리로 뛰쳐나온 청년들이 경찰소와 관공서를 공격하고, 그들을 막아선 경찰이 최루탄과 실탄을 발포하면서 수십 명이 죽거나 다쳤으며, 정부는 야간 통행금지를 선포했다. 그 와중에 또 다른 청년 두 사람이 “일자리와 자유, 존엄”을 외치며 관공서 옥상에서 몸을 던져 중상을 입는 일도 벌어졌다.

이런 일련의 사태는 전 세계 시민들로 하여금 너무나도 익숙한 기억을 되살리게 만들었다. 5년 전 바로 그 곳 튀니지에서 시작돼 이집트, 리비아, 시리아, 예멘, 이라크, 바레인, 요르단, 알제리, 이스라엘, 사우디아라비아 등등의 북아프리카와 중동 지역 전체, 아니 미국의 위스콘신 노동법 개악반대 투쟁과 월스트리트 점거 운동, 스페인과 그리스에서 좌파 정치세력의 급부상에 이르기까지 세계 전체를 뒤흔드는 계기가 되었던 ‘아랍의 봄’ 민중항쟁에 대한 기억 말이다. 그러나 이집트가 다시 과거보다 더한 군사독재로 회귀하고, 리비아는 사실상 산산이 분해되기 직전에 이르렀으며, 시리아와 예멘, 이라크에서는 피의 내전이 수년 째 이어지면서 사람들은 어느 덧 봄을 이야기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점점 희미해지는 희망의 빈자리를 체념과 좌절, 냉소로 대신 채워가기 시작했다. 그런 가운데 그나마 독재에서 민주주의로의 이양에 성공한 유일한 모범 사례로 칭송받던 튀니지에서 또 다시 비슷한 양상이 되풀이된 것이다. 역시나 혁명은 한낱 꿈에 불과한 것이었던 걸까.

TUNISIA-POLITICS-DEMOtunisia_Kasserine

수십년 간 응축되어온 정치/경제/사회적 모순이 한꺼번 폭발했던 2010/11년의 그 날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런 시각 자체가 애초에 아랍의 봄 항쟁의 성격을 잘못 짚은 데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그래도 혁명은 계속된다(혹은 승리한다)’는 식의 막연한 낙관론을 펴자는 게 아니다. 당시 주류 언론들은 튀니지 벤 알리 대통령 24년, 이집트 무바라크 대통령 30년, 리비아의 카다피 42년 하는 식으로 독재정권의 장기집권과 폭정 같은 정치적인 측면과 청년 실업이라는 경제적인 일부 측면, 그리고 당시 지역을 휩쓸었던 가뭄 같은 일시적인 측면에만 주로 초점을 맞췄었다. 그러나 아랍의 봄은 근본적으로 지역에서 수십 년간 누적되어오던 정치, 경제, 사회적인 모순이 응축돼서 한꺼번에 폭발한 사건이었다. 그토록 오랜 기간에 걸쳐 켜켜이 쌓이고 쌓여온 모순은 단지 독재자를 쫓아내고 헌법을 바꿔 새로운 정부와 의회를 구성한다고 해서 한순간에 해결되지는 않는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아랍의 봄은 지금까지 인간의 역사가 그래왔듯이 끊임없는 전진과 후퇴, 혁명과 반혁명을 거듭해가며 앞으로 5년, 10년, 아니 수십 년 간 계속 이어질 ‘혁명적 과정’의 한 부분이었을 뿐이다. 애초부터 5년이란 세월을 가지고 성공이냐 실패냐를 논할 성격의 사건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그런 관점을 바탕에 깔고 아랍의 봄의 지난 5년을 간단히 정리해보고자 한다. 그리고 항쟁의 주체와 조직화된 운동의 중요성에 관한 이야기로 끝을 맺을 것이다. 왜 튀니지에서는 비교적 순조롭게 민주주의로의 전환이(물론 상대적인 측면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이뤄진 반면 이집트에서는 반혁명 세력이 권력을 다시 장악하게 됐는지, 그리고 리비아와 시리아, 예멘, 이라크는 내전에 빠져들게 되었는지, 그 차이를 해명하고 앞으로의 전망과 과제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할 부분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2010년 12월 17일, 튀니지 중부의 시디 부지드란 도시에서 27살 청년 모하메드 부아지지의 분신자살로 촉발된 민중항쟁의 물결은 모두가 알다시피 삽시간에 북아프리카와 중동 지역 전체를 휩쓸었다. 맨 먼저 튀니지의 독재자 지네 엘 아비딘 벤 알리 대통령이 항쟁이 시작된 지 한 달 뒤인 2011년 1월 14일 비행기를 타고 사우디아라비아로 도망쳤다. 사전에 미리 200억 달러(한화 약 22조원)가 넘는 비자금을 해외로 빼돌리고 난 뒤의 일이었다. 그 다음으로는 이집트의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이 항쟁 시작 약 보름여 만인 2월 11일에 대통령 직을 사임했다. 그리고 그 시각 인접한 리비아의 동부 도시 벵가지와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쿠스, 바레인의 수도 마나마, 예멘의 남북부 도시들에서도 거의 동일한 요구를 내건 대규모 시위가 시작되고 있었다. 이내 이라크와 요르단, 오만, 쿠웨이트, 레바논, 모로코의 시민들이 그 뒤를 따랐다. 그 중에서도 항쟁이 일어났던 주요 국가들을 중심으로 항쟁 이후를 간략히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튀니지

외형은 민주주의로의 평화적 이양 성공

내용은 또다른 민중항쟁 재현의 불씨가 여전해

일반적으로는 아랍의 봄 항쟁에서 유일한, 아니 현재까지는 가장 ‘성공한’ 사례로 평가된다. 물론 벤 알리 정권이 쫓겨난 뒤 치러진 선거에서 승리한 이슬람주의 정당 ‘에나흐다(부흥) 운동’이 제헌의회를 주도해 종교적 색채가 강한 헌법을 도입하려고 하면서 한 때 이슬람주의자들과 세속적 성향의 사회운동 세력, 구정권 출신 엘리트 세력 간의 경쟁과 다툼으로 어두운 내전의 그림자가 드리운 적도 있었다. 특히 이슬람주의에 비판적이던 좌파 운동가 모하메드 브라히미와 초크리 벨라이드가 잇달아 암살되면서 그러한 우려는 현실로 드러나는 듯 했다. 2012년과 2013년 내내 계속되던 항의시위와 파업, 폭력사태는 그러나, ‘튀니지 노총(UGTT)’이 중심이 돼 결성된 ‘국민 대화’ 기구가 이슬람주의 세력과 구정권 세력 간의 중재 역할을 자임하고 나서면서부터 일대 국면의 전환을 맞게 된다. 2014년 총선과 대통령 선거를 무사히 치름으로써 구정권 인사들이 주축을 이룬 ‘니다 튀니스(튀니지의 요구)’당과 에나흐다 당 간의 권력 분점이 이뤄진 것이다. 튀니지 노총은 그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튀니지산업·무역·수공업연맹(UTICA)’, ‘튀니지인권연맹(LTDH)’, ‘튀니지변호사회(ONAT)’와 함께 2015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는 영예까지 누리게 된다. 그러나 오늘날의 튀니지는 5년 전 아랍의 봄 당시에 죽음을 불사하며 싸웠던 민중들이 염원했던 모습과는 아직 한참이나 거리가 멀다. 앞서 리다 야히야위의 자살이나, 오늘날 ‘이슬람국가(IS)’에 가담한 튀니지 청년들의 숫자가 5천 명을 넘어선다는 유엔 보고서에서도 알 수 있듯이, 튀니지는 외형적으로는 독재에서 민주주의로의 평화적 이양에 성공했을지 몰라도 내용적으로는 언제든지 또 다른 민중항쟁이 재현될 불씨를 여전히 안고 있다. 그리고 독재자를 몰아내는 데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튀니지 노동운동은 세속주의 부르주아 세력과 구 엘리트, 온건 이슬람주의 세력에게 민중항쟁의 성과를 고스란히 넘겼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집트

항쟁의 정치적 과실을 독식한 이슬람주의 세력…그를 뒤집고 권력을 장악한 군부

무바라크 때보다 더한 독재로 회귀한 엄혹한 현실

무바라크 대통령의 축출 직후 가장 먼저 발 빠르게 항쟁의 성과를 챙겨간 세력은 ‘무슬림 형제단’을 주축으로 한 이슬람주의 세력이었다. 이는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는지도 모르겠는데, 군사독재 하의 이집트에서는 집권당을 제외하고는 일체의 정당도 허용되지 않았고 유일한 합법 노동조합이던 ‘이집트 노조총연맹’ 역시도 완전히 정부의 통제 하에 있었던 상황이었기에 오랫동안 정부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빈민 구제와 사회교육으로 대중들의 신망을 얻어오던 무슬림형제단은 구정권 세력의 복귀를 막을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대항마였던 것이다. 그러나 모하메드 무르시 대통령의 ‘자유정의당(FJP)’(무슬림 형제단의 정치정당)은 집권 후 튀니지의 에나흐당과 마찬가지로 사회적인 모순 해결 노력보다는 이슬람주의 색채를 강화하는 데에만 노력을 기울였다. 게다가 모르시 정부가 이전부터 민중들의 원성을 사던 국제통화기금(IMF)의 긴축 정책을 그대로 유지하고 연료와 식료품에 대한 보조금을 대폭 삭감하기까지 하면서, 민중들 사이에서는 ‘이러려면 우리가 무엇 때문에 피를 흘렸나’하는 목소리가 자연스레 터져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러자 그걸 기회로 파고든 세력이 바로 군부였다. 무르시 정권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전역에서 터져 나오자, 2013년 7월 3일 군사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장악한 것이다. 그 뒤 압델 파타 알 시시 전 육군 참모총장이 형식적인 선거를 거쳐 대통령 직에 오른 뒤, 이집트는 사실상 아랍의 봄 이전으로 회귀해버렸다. 아니, 2013년 쿠데타 이후 천 여 명이 넘는 무슬림 형제단 지지자들이 살해당했을 뿐만 아니라, 무수한 인권 및 노동운동가, 언론인, 법률가, 일반 시민들이 정부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체포, 구금, 고문당하고 있는 오늘의 현실은 오히려 무바라크 독재 시절보다 훨씬 더 엄혹하다는 평가다.

리비아, 시리아, 이라크, 예멘

민중들의 조직 역량 부재와 외세의 개입은 결국 내전으로 귀결돼

이 네 나라를 한데 묶은 데는, 물론 지면의 한계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이들 국가가 민주주의와 자유, 평등을 향한 민중들의 염원이 외세의 직접적인 개입으로 인해 내전이라는 참혹한 비극으로 이어진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우선 리비아와 시리아의 민중항쟁이 튀니지와 이집트의 경우와 가장 구별되는 점은 항쟁 초기부터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무장에 나섰다는 점에 있다. 이와 관련해서는 여러 가지 주장들이 제기되지만, 가장 근본적으로는 두 나라 정권이 그만큼 폭력적이고 잔인한데 비해 항쟁에 나선 민중들은 무장이라는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 예를 들어 총파업이나 이집트의 타흐리르 광장 점거와 같은 방식을 취할만한 조직적 역량을 전혀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는 데 원인이 있다. 당장 리비아만 보더라도 1971년의 단체법에 따라 모든 사회단체와 노동조합이 불법화되었고, 이듬해 정당정치행위 금지법 71호로 일체의 정당 설립이(이집트의 무슬림 형제단처럼 준정치정당의 성격을 띠는 조직도 금지돼 있었다) 불허됐으며, 국민들은 약 140여개의 부족 단위로 뿔뿔이 흩어져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카다피 정권과 그 용병들로부터 항쟁에 나선 국민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미국과 영국, 프랑스 등은 리비아에 대한 직접적인 군사개입을 감행해 정권을 몰아내고 카다피를 처형했다. 마치 카다피만 사라지면 모든 게 해결될 것처럼 말이다. 아무튼 그 바람에 현재 리비아는 수도 트리폴리를 차지한 이슬람주의 세력과 국제사회로부터 그 실체를 인정받은 동부 토브루크의 대표회의 세력이 서로 리비아를 대표하는 유일한 정부를 자처하며 내전을 벌이고 있고, 그 와중에 이슬람국가(IS)를 비롯한 1천 7백 개가 넘는 무장조직들이 이합집산을 거듭하는 ‘실패한 국가’의 전형이 되어 버렸다.

시리아와 이라크 역시 거의 마찬가지다. 시리아 내전이 이토록 참혹하고 오래도록 지속되는 이유는 단 하나, 그것이 사실상 지역과 세계열강들 간의 대리전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2011년 남부 다라 지역에서 보안군이 반정부 낙서를 했다는 이유로 15명의 아이들을 끌고 가 고문한 사건을 계기삼아 대규모 민중항쟁이 불붙기 시작한 시리아는 현재 크게 4개의 집단들이 나라를 분점하고 있는 양상이다. 첫째는 러시아와 이란, 레바논 헤즈볼라를 등에 업은 아사드 대통령 정부, 둘째는 미국과 서구, 그리고 걸프 국가들의 지원을 받는 세속주의 반군, 셋째는 이슬람국가와 알 누스라 전선 같은 이슬람주의 무장 세력들, 넷째는 흔히 ‘로자바’라 불리는 북부의 시리아 쿠르드 인들, 이렇게 말이다. 이를 다시 순서대로 설명하면, 초기부터 시아파인 아사드 정권의 축출에 목표를 둔 사우디를 비롯한 친미 수니파 걸프 국가들과 미국은 ‘자유시리아군’이 중심이 된 세속주의 반군들을 상대로 적극적인 무기와 자금 지원에 나섰다. 그러자 수니파 걸프 국가들과 지역 패권을 놓고 다투는 이란과 헤즈볼라는 아사드 정권을 방어하기 위해 직접적으로 전투에 끼어들었고, 중동에서는 유일하게 시리아에 자국의 해군과 공군기지를 두고 있던 러시아도 2015년 9월부터 공습에 참여하며 내전을 점점 더 수렁으로 몰아넣었다. 이런 외세 간의 대리전을 영리하게 파고 든 세력이 바로 이슬람국가(IS)를 비롯한 이슬람주의 세력이었다. 사실 이들은 미국의 2003년 이라크 침공이 만들어낸 산물이면서, 동시에 아랍의 봄의 좌절이 낳은 변종이었다. 즉 아랍의 봄 당시에 시아파가 장악한 이라크 중앙 정부로부터 2등 시민 대우를 받던 이라크 북부의 수니파 청년들은 지역의 다른 국가 청년들과 마찬가지로 공공장소에 시위 천막을 설치하고 공공기관을 점거하는 등 평화적인 방식의 저항운동을 전개한 바 있다. 그러나 자신들의 요구가 정부에 의한 잔인한 탄압으로 되돌아오자 그들은 다른 대안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자신들에게 가족을 부양할 임금을 지급하고, 더 나아가 지금 겪고 있는 차별과 억압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을(비록 헛된 희망이라 할지라도) 제시하는 이들, 바로 급진 이슬람주의 세력에게로 달려가기 시작한 것이다.

예멘은 한 때 튀니지와 더불어 아랍의 봄의 또 다른 성공 사례로 꼽혔던 나라였다. 남북으로 갈라져 있다가 1990년 통일된 이후로 단 한 번도 정권을 손에서 놓지 않았던 알리 압둘라 살레 대통령을 자진 사임시킨 뒤 정권 교체를 이룩해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항쟁 당시 민중들이 원했던 것은 구체제를 완전히 몰아내고 새로운 역사를 스스로의 손으로 써내려가는 것이었던 반면, 실상은 걸프 국가들의 개입 하에 대통령만 바꾼 꼴에 그치고 말았다. 그것도 이전 대통령 밑에서 부통령을 하던 사람을 새 대통령으로 앉히는 방식으로 말이다. 이는 지역의 지배계급들과 그들을 지원하는 서구 정권들이 아랍의 봄의 확산을 막아보려 얼마나 혈안이 돼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그러니 지금 예멘 내전의 한 축인 후티족 반군이 됐든 누가 됐든 간에 항쟁 이후의 혼란은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인 지도 모른다. 인간다운 삶을 위해 그토록 열심히 싸웠는데 도무지 바뀐 게 없기 때문이다. 어쨌든 현재 예멘은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지역 연합군들이 예멘 정부군을 대신해 후티 반군과 직접 전쟁을 벌이고, 쫓겨난 살레 전 대통령 세력은 권토중래를 꿈꾸며 반군 편에 붙어서 과거에 한 편이었던 구체제 엘리트 세력과 싸우는 이상한 구도가 펼쳐지는 형국이다.

결국은 풀뿌리 민중운동의 조직화와 힘기르기 만이 터널의 출구다 

여기까지 간략한 설명을 마치고, 마지막으로 앞서 제기했던 질문, 즉 비슷한 배경과 거의 동일한 요구를 내걸고 시작된 아랍의 봄 항쟁이 나라별로 이렇게 다른 양상으로 전개된 이유가 무엇인지를 되짚어보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하도록 하자. 그것은 결국 항쟁의 주체와 조직적 역량에서 비롯되는 차이였다. 튀니지의 경우에는 비록 독재정권 하이긴 했지만 북아프리카와 중동을 통틀어 가장 강력하고 잘 조직된 노동운동이 존재해왔던 나라였다. 실제로 항쟁 당시 그토록 빠른 시일 내에 벤 알리 대통령의 사임을 이끌어낸 결정적 계기는 1월 10일 튀니지 노총의 총파업 선언이었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였다. 그 날부터 각 지역에서부터 순차적으로 하나씩 시작된 파업의 물결이 수도 튀니스를 뒤덮은 바로 그 날, 벤 알리 대통령이 사임을 발표한 것은 결코 우연의 일치만은 아닌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집트 역시도 항쟁이 있기 오래 전인 2004년부터 무려 3천여 건이 넘는 노동쟁의가 이어져왔던 나라였다. 특히 무바라크가 물러나기 사흘 전, 전국의 공무원, 공기업, 운송, 석유, 의류, 관광, 언론 노동자들은 일제히 일손을 놓아버렸고, 그러자 2주 간의 시위로 인한 엄청난 재정 손실에 전전긍긍하던 자본가들이 먼저 무바라크에게서 등을 돌렸으며, 중동에서 유럽과 미국으로 가는 유조선들이 반드시 통과해야하는 수에즈 운하가 폐쇄될까 좌불안석이던 서구 정부들이 무바라크를 버렸다. 그에 비해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리비아와 시리아, 이라크, 예멘 등지에서는 튀니지와 이집트에 비길만한 조직된 운동 세력이 없었다. 운동적 방식으로 변화에 대한 민중들의 열망을 이끌어가고 구체적인 성과로 이어갈 수 있는 역량 자체가 없었기에 무장투쟁 말고는 다른 상상력이 작동할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이는 고스란히 앞으로의 과제나 전망과도 연결된다. 튀니지의 노동운동이 지배계급과의 타협을 선택하고, 이집트의 민중운동 세력이 군부의 반동적인 반혁명 흐름을 막지 못했던 것은 아직까지 그들이 가진 역량이 딱 거기까지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5년 전의 경험을 되돌아보며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실력을 키워가는 것이 과제일 것이다. 시리아를 비롯한 그 외의 나라들은 지금부터라도 민중들이 주체가 된 사회운동 세력을 하나씩 조직하고 훈련시키는 것 말고는 답이 없다. 그러지 않고서는 시리아 평화회담이니, 군사적 해결방법이니 해도 백약이 무효다. 당장 사람이 죽어나가는 데 한가한 소리만 늘어놓는다고, 하나마나 한 이야기는 그만 두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 아랍의 봄은 앞으로 수년, 수십 년 간 더 이어질 기나긴 변혁의 과정에서 이제 겨우 초입 단계를 통과하고 있는 중이라는 걸 기억하기 바란다.

* 이 글은 <변혁정치> 20호(2016.04.01)에도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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